입력 : 2026.10.30 06:00
[땅집고] "서울 주변에 골프장이 몇 개 있느냐. 골프장에 20평, 30평 임대주택을 지으면 된다."
'샐러리맨 신화'로 불리는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이 최근 경희대 경영대학원 설립 60주년 기념 인사이트 포럼에서 서울·수도권 주택 공급 해법으로 골프장 부지 활용방안을 꺼내 들었다. 박 회장은 "규제가 한국의 부동산을 오르게 하고 있다. 아파트 조심해야 한다. 떨어질 가능성이 많다"고도 했다. 도심 저층 업무용 빌딩을 허물고 20층까지는 오피스, 그 위로는 아파트를 올리는 복합개발도 함께 제안했다.
박현주 회장에 앞서 디벨로퍼인 김언식 DSD삼호 회장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공공기관이 소유한 서울 인근 골프장을 임대주택 부지로 활용하자는 제안을 한 바 있다. 국방부·국가보훈처 등이 소유한 수도권 골프장 4곳에만 전용면적 45~58㎡ 소형 임대주택 15만5000여 가구를 지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골프장을 지방으로 옮기고, 서울 도심에서 20~30분 거리인 알짜 부지에 임대주택을 지으면 수요가 몰릴 것"이라며 "이미 개발된 땅이라 기반시설과 녹지가 잘 갖춰져 있고, 환경훼손 논란도 없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미 해외에선 주택난 해결을 위해 골프장을 헐고 임대아파트를 짓고 있다.
◇싱가포르, 120년 골프장에 1만 가구…보상 없이 '계약 만료'로 회수
1904년에 문을 연 싱가포르 남부 해안의 케펠클럽(Keppel Club)은 48㏊(14만5000평) 부지가 주택 약 1만 가구 규모의 아파트단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베를라야르(Berlayar)' 사업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2022년 9000가구 공급 계획을 발표했다가, 지난해 9월 공공주택 7000가구·민간주택 3000가구로 규모를 키웠다. 분양 열기도 뜨겁다. 공공주택 첫 단지인 '베를라야르 레지던스'(880가구)는 지난해 10월 분양했다. 입주까지는 4년 8개월가량 걸린다. 올해 6월 분양한 두 번째 단지 '베를라야르 라이즈'(1976가구)에는 8824명이 몰려 4.5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사업이 큰 잡음 없이 굴러가는 건 땅이 처음부터 국가 소유였기 때문이다. 케펠클럽은 국유지를 빌려 골프장을 운영해왔다. 정부는 2014년 "주택 개발에 땅이 필요하다"며 임차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일찌감치 통보했다. 골프장은 2022년 6월 계약 만료와 함께 땅을 반환했다. 별도 토지보상은 없었다.
◇홍콩, 최고(最古) 골프장 개발 추진했다가 법원에 막혀
주택난이 심각한 홍콩도 골프장에 눈을 돌렸다. 2018년 캐리 람 당시 행정장관이 꾸린 토지공급 태스크포스는 홍콩에서 가장 오래된 판링(Fanling) 골프장 172㏊ 중 32㏊를 주택용지로 쓰자고 제안했다. 홍콩 정부는 2023년 9월 이 32㏊를 실제로 회수했다. 이 중 9.5㏊에 공공주택 약 1만2000가구를 지어 2029년 입주시킨다는 계획이었다. 나머지 부지는 환경영향평가에서 생태적 가치가 중~상으로 평가돼 보존하기로 했다.
골프장 측은 즉각 반발했다. 환경영향평가가 생태 가치를 과소평가했고 주민 의견 수렴도 부족했다며 사법심사를 청구했다. 아시안투어 등 국제대회 주최 측은 "판링이 개발되면 홍콩에서 국제대회를 열 곳이 없다"며 대회 철수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결과는 정부의 패배였다. 1심 법원이 환경영향평가 승인을 취소했고, 올해 8월 말 항소법원도 보완 자료를 공개 열람에 부치지 않은 절차가 불공정했다며 1심 판단을 유지했다. 홍콩 정부는 9월 24일 상고를 포기했다. 정부는 사업 규모와 일정을 다시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2029년 입주 목표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서도 태릉CC 등 정부 소유 골프장
박 회장 구상이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서울 노원구 태릉CC다. 국방부 소유로 국군복지단이 운영하는 이곳은 올해 1·29 대책으로 6800가구 건설이 확정됐다. 2029년 착공이 목표다. 다만 조선왕릉 세계유산영향평가, 임대주택 비율을 최소화해달라는 노원구 요구, 국방부가 원하는 대체 골프장 마련 등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경기 용인 88CC도 꾸준히 거론된다. 1988년 문을 연 이곳은 국가보훈부 산하 88관광개발이 운영한다. 2008년 공공기관 선진화 계획에 따라 매각 대상으로 지정됐지만 지금까지 표류하고 있다. 문제는 회원제 골프장으로 회원만 1900명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 광주 뉴서울CC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진흥이 운영한다. 문화예술진흥기금 마련을 위해 여러 차례 매각이 거론됐지만, 개발되면 문화예술 재원이 줄어들고 서울 접근성도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한계가 있다.
◇민간은 회원권이 걸림돌…’퍼블릭' 레이크사이드CC 주목
민간 회원제 골프장은 땅값에 회원 입회금 반환 문제까지 얽혀 있어 공공이 사들여 임대주택을 짓기엔 비용 부담이 너무 크다. 반면 퍼블릭(대중제) 골프장은 회원권 부담이 적어 개발 여지가 상대적으로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에서 최적지로 꼽는 곳은 용인 레이크 사이드CC이다. 삼성물산과 에버랜드가 2014년 3600억원에 인수한 골프장으로 부지 면적이 약 417만㎡(126만평)로 단일 골프장으로는 국내 최대 수준이다. 약 27만㎡(8만평) 규모의 미개발 유휴지도 보유하고 있다. 신도시 싱가포르의 케펠클럽 골프장의 개발 밀도면 8만 가구의 신도시도 가능하다. 총 54홀 중 회원제는 18홀뿐이고 나머지 36홀은 퍼블릭이다. 회원도 441명에 불과하다. 신도시로 개발할 경우, 천문학적인 개발이익도 가능하다. 정부 입장에서는 개발을 허용할 경우,임대주택 공급 확대라는 명분을 취할 수 있고 삼성물산은 인허가에서 혜택을 볼 수 있다.
입지도 좋다. 행정구역상 용인시 처인구지만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판교, 광주시와 맞닿아 있다. 차로 분당 정자역이나 판교역까지 10~15분, 헌릉IC를 거치면 강남역까지 30~40분대에 닿는다. 인근의 88CC와 연계 개발도 가능하다. 88CC는 전체 85만평으로 규모로 36홀이다.
업계에선 골프장 부지가 일반 택지보다 개발에 유리하다고 본다. 산을 깎아 택지를 만들면 막대한 토목 공사비와 환경 훼손 논란이 따르지만, 골프장은 이미 수십 년간 지반 평탄화가 끝나 공사 기간과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골프장의 조경수와 인공 호수를 그대로 단지 조경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뉴욕 센트럴파크처럼 대형 공원을 품은 '숲세권' 단지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소유주인 삼성물산 입장에서도 공공임대 주택과 민간분양, 삼성전자 R&D센터를 갖춘 신도시로 개발할 경우, 수익성과 함께 사회적 기여라는 명분도 챙길 수 있다. /hbcha@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