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6.10.26 06:00
[연중 기획-산업 재해 제로(0)의 길] HD현대
계열사 HD현대일렉트릭 공사현장서 추락사
HD현대중공업에서만 5명 숨져…노동부 감독서 위반 859건
정기선 회장 취임 1주년 직후 또 사고…"안전이 브랜드" 선언 무색
[땅집고] 정기선 HD현대 회장이 취임 1주년을 맞은 지 이틀 만에 그룹 계열사에서 또 사망사고가 났다. 올해 들어 HD현대그룹 계열사에서 일어난 8번째 사망사고다. 정 회장은 취임 직후 '중대재해 제로'와 '안전이 브랜드가 되는 회사'를 선언했다. 하지만 사고가 끊이지 않으면서 그룹의 총체적인 안전관리 능력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다.
23일 HD현대일렉트릭의 중대재해 발생 공시에 따르면 사고는 지난 19일 오전 8시 52분쯤 일어났다. 장소는 HD현대일렉트릭의 종속회사인 HD현대플라스포의 울산 변압기 신공장 공사현장 콘덴서룸이다. 외부 공사업체 소속 40대 작업자 A씨가 신축 중인 공장 콘덴서룸에서 장비를 옮기다 바닥에 뚫린 개구부 아래 약 20m로 떨어졌다. A씨는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이송됐으나 끝내 숨졌다. 경찰은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HD현대일렉트릭은 사고 당일 부산지방고용노동청 울산동부지청의 명령에 따라 부분 작업중지에 들어갔다. 회사 측은 "경찰, 고용노동부의 현장 조사에 적극 협조하는 한편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작업 중 추락은 안전난간이나 개구부 덮개 같은 기본 조치만으로 막을 수 있는 대표적인 '후진국형' 사고로 꼽힌다.
◇HD현대중공업서만 5명 사망…그룹 전체 8명
올해 HD현대 계열사의 사망사고는 주력 계열사인 HD현대중공업에 집중됐다. 이 회사에서만 5명이 숨졌다.
4월 9일 울산조선소에서는 창정비 중이던 해군 잠수함 내부에 불이 나 60대 협력업체 근로자가 숨졌다. 7월 18일에는 울산조선소 LNG 운반선 화물창에서 20대 우즈베키스탄 국적 협력업체 근로자가 사망했다. 곤돌라를 타고 사상작업(울퉁불퉁한 용접부 등을 그라인더로 갈아내는 작업)을 하다 곤돌라와 상부 발판 사이에 끼였다. 엿새 뒤인 7월 24일에는 군산조선소 패널공장에서 협력업체 근로자가 장비와 철제 구조물 사이에 끼여 숨졌다.
8월 14일에는 울산 용연공장에서 하청노동자가 후진하던 트레일러에 깔렸다. 이 노동자는 치료를 받다 9월 1일 숨졌다. 8월 28일에는 사내 복지시설인 한우리회관 보일러 기계실에서 시설관리 업무를 하던 근로자가 쓰러진 채 발견됐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고, 정확한 사인은 조사 중이다.
다른 계열사에서도 사고가 이어졌다. 6월 HD현대삼호 영암조선소에서는 선박 접안 작업 중 끊어진 밧줄에 맞은 근로자가 숨졌다. 7월 9일에는 HD현대엠앤에스 울산공장에서 천장크레인 모터를 교체하던 60대 협력업체 근로자가 약 12m 아래로 떨어져 사망했다. 이번 HD현대플라스포 추락사까지 더하면 올해 그룹 계열사 사망자는 8명이다. 이 가운데 최소 6명이 협력업체 소속이다.
7월 곤돌라 사고 때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중공업지부는 회사가 사고 방지를 위한 기본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노조는 "사고 곤돌라에는 과상승 방지장치가 갖춰져 있었으나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위치에 발판이 설치돼 있었다"고 했다. 이어 "발판 추가 설치 시 위험성을 평가해 과상승 방지장치를 재조정하거나 곤돌라의 위치를 수정했어야 하는 의무를 묵살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용노동부는 8~9월 감독관 약 50명을 투입해 HD현대중공업을 고강도로 감독해 위반 사항 859건을 적발했다. 감독 결과 시정명령과 사법조치가 이어졌고, 4억6460만원의 과태료도 부과된 것으로 알려졌다.
◇"중대재해 제로" 선언 1년…부메랑 된 약속
정 회장은 2009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한 지 16년 만인 지난해 10월 회장직에 올랐다. 이로써 HD현대의 오너 경영 체제가 37년 만에 부활했다. 정 회장은 지난 17일 취임 1주년을 맞았다.
정 회장은 취임 직후부터 안전을 앞세웠다. 지난해 12월 경기 성남시 HD현대 글로벌R&D센터에서 열린 ‘HD현대 세이프티 포럼’에서 그는 “사업장 내 안전은 사회적 약속이나 규범의 차원이 아닌 기업의 생존을 결정짓는 필수 조건”이라며 “작은 징후라도 놓치지 않고 중대재해 제로 사업장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회사는 이 자리에서 안전 비전으로 '모두가 안전한 작업장, 안전이 브랜드가 되는 회사'를 공표했다. 빅데이터와 AI(인공지능)를 활용해 안전 문제를 예측하고 실시간 대응하겠다고 했다. 5년간 총 3조5000억원 규모의 안전 예산을 투입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그러나 선언 이후 1년도 안 돼 사망자 8명이 나왔다.
정 회장은 지난 8월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우리가 꿈꾸는 미래는 안전이 담보될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는 만큼, 안전을 경영의 최우선 가치로 두고 역량을 집중해달라"고 다시 강조했다. 그룹은 이달 7일 사장단 인사에서 조민수 HD현대중공업 조선사업 대표(부사장)를 사장으로 승진시키고 안전총괄 대표이사로 내정했다. 그러나 인사 발표 12일 만에 또 사망사고가 터졌다. 한 업계 관계자는 "오너가 직접 '중대재해 제로'를 약속한 만큼 이제는 선언이 아닌 사망사고 감소라는 결과로 증명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sh0293@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