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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은 풍요가 아닌 결핍이 낳았다…만 년의 벼랑 끝에서 '나눔'을 구운 인류

    입력 : 2026.07.14 13:34 | 수정 : 2026.07.14 13:38

    [땅집고 북스] 『빵 굽는 철학자』가 던진 통념의 전복

    [땅집고] 《빵 굽는 철학자》 책 표지

    [땅집고] 인류는 배가 부르고 나서야 비로소 철학과 문명을 고민하기 시작했을까. 우리는 오랫동안 농경을 통한 잉여 농산물의 축적이 거대한 도시를 낳고, 그 풍요의 토대 위에서 비로소 정신문화가 싹텄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문명의 출발점을 집요하게 추적한 신간 『빵 굽는 철학자』는 이 안일한 통념의 뒤통수를 보기 좋게 내리친다. 문명은 풍요가 아니라, 생존을 위협하는 지독한 결핍과 위기 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전작 『호모레퍼런스』를 통해 ‘참조하는 인간’이라는 참신한 인문학적 프레임을 제시했던 김문식이 이번에는 공저자 정창원의 시각을 더해 새로운 인류학적 화두를 던진다. 이름하여 ‘퍼블릭 사피엔스(나누는 인간)’.

    책의 여정은 수메르와 이집트보다 훨씬 앞선 만 년 전의 과거, 튀르키예 남동부 아나톨리아 고원의 카라한 테페와 괴베클리 테페로 독자를 이끈다. 문자도, 농경도 체계화되지 않았던 그 까마득한 옛날, 수백 명의 인간이 모여 웅장한 거석 구조물을 세우고 음식을 나눈 흔적이 발견됐다. 더 나아가 요르단 사막의 1만4400년 전 화덕에서는 곡물을 곱게 갈아 구워낸 납작빵의 잔해가 나왔다. 거친 죽을 끓여 먹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을 텐데도 말이다.

    저자들은 여기서 인류 생존의 비밀을 포착한다. 혹독한 미니 빙하기였던 ‘영거 드라이아스’ 시절, 살아남은 것은 몽둥이를 든 힘센 부족이 아니었다. 낯선 부족과 빵을 쪼개 나누며 신뢰와 동맹을 선택한 이들이었다. 즉, 인류는 여유가 있어서 나눈 것이 아니라, 벼랑 끝 생존 위기에서 ‘나눔’을 발명했기에 비로소 사피엔스로서 번성할 수 있었다는 논리다.

    책은 이 ‘공익의 관성’이 만 년의 역사를 관통하며 갈라진 두 갈래 길을 정밀하게 추적한다. 섬과 해안선이 복잡하게 얽힌 서쪽(그리스)에서는 대중이 스스로 탐욕을 제어하는 규칙인 토론과 민주주의가 싹텄다. 반면, 거대한 대홍수를 주기적으로 통제해야 했던 남쪽 나일강에서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집중시키기 위해 신성한 왕권이 군림했다.

    여기서 저자들은 또 하나의 통념을 깨뜨린다. 피라미드는 노예들의 피눈물로 지어진 폭정의 산물이 아니라, 홍수로 일자리를 잃은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거대한 ‘공공 근로’의 현장이었다는 해석이다. 시선을 한반도로 돌리면 전 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모인 이 땅에서 공동체 전체가 거대한 돌을 함께 나르며 다졌던 연대, 즉 ‘홍익인간’의 철학과도 맥이 닿는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책상 위에서 굴린 건조한 먹물 내음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카라한 테페부터 차탈회위크, 밀레토스, 이집트, 그리스를 거쳐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수년간 역사적 현장을 직접 발로 밟았다. 허리를 굽혀 차탈회위크의 낮은 출입구를 통과하고, 밀레토스 원형극장에 앉아 탈레스가 바라보았을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본문에 수록된 생생한 사진들은 모두 저자가 현장에서 직접 촬영한 결과물이다. 이공계와 저널리즘의 시각이 유려하게 융합된 참신한 문장들은 난해한 고고학적 유적들을 지금 이 순간 숨 쉬는 생생한 서사로 둔갑시킨다.

    만 년의 장대한 여정 끝에 저자들이 도달한 결론은 지극히 현재적이다. 저자들은 “좋은 지도자보다 좋은 제도가 먼저”라고 선언하며 선을 긋는다. 그들이 말하는 ‘공익 지도력’은 영웅의 숭고한 희생이나 도덕성이 아니다. 자신을 더 큰 공동체와 연결하는 실용적인 방식이자 시스템이다. 백성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직시한 세종이나 이름 없는 병사의 공을 철저히 나누었던 이순신의 리더십 역시 퍼블릭 사피엔스의 조건인 ‘보는 것, 나누는 것, 지속하는 것’을 충족한 결과물이다.

    다수의 의견이 집단이기주의로 변질되고, 소수를 향한 조롱이 일상이 된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경계는 이미 무너지고 있을지 모른다. “어떻게 하면 함께 사는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가”라는 만 년 전 카라한 테페의 이름 없는 지도자가 던졌던 질문은, 오늘날 각자도생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묵직한 울림을 준다.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읽듯 가볍게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스스로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나누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 서서 고민하는 당신이 바로 이 시대의 ‘빵 굽는 철학자’다.

    저자 김문식은 한양대학교에서 생화학을 전공한 후 관광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피앤에프시스템즈 대표이자 한양대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로, 35년간 문화와 산업을 잇는 현장에서 일해왔다. 전작 『호모레퍼런스』에서 인류 문명이 소수의 천재가 아니라 서로를 참조하는 집단 지성의 힘으로 발전해왔음을 밝혔다. 이번 책에서는 그 질문을 한 걸음 더 밀고 나갔다. 최초의 지도자는 왜 빵을 나누었는가.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인류가 왜 서쪽에서는 민주주의를, 남쪽에서는 신이 된 왕을 만들었는가. 그 답을 찾아 튀르키예와 이집트, 그리스와 한반도의 유적을 직접 걸었다.

    공저자 정창원은 한양대학교를 나와 건국대와 한성대에서 각각 부동산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10년 미국 존스홉킨스대 SAIS에서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1996년 MBN에 입사해 주로 부동산과 정치 분야를 취재했다. 경제·산업부장 5년, 사회부장 1년, 정치부장 4년을 지냈고, 시사제작국장을 거쳐 2023년부터 기획실장을 맡고 있다. 〈MBN 뉴스〉, 〈부동산 전망대〉, 〈경제포커스〉 등을 진행했으며, 한국방송기자클럽 ‘올해의 방송기자상’,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 ‘좋은세상 나눔이상’, ‘케이블TV협회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1조 원의 사나이들』, 『돈이 보이는 부동산 릿츠』, 『관광으로 1억 내수시장을 연다』 등이 있다. 이른바 ‘정치를 아는 경제통’으로 불리며, 역사에 관심이 많다. /hbch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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