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6.02.26 06:00
종로구 주민들 ‘추진위’ 구성
동묘벼룩시장 명성 VS 행정지명 회복
“동묘 아닌 숭인동”
동묘벼룩시장 명성 VS 행정지명 회복
“동묘 아닌 숭인동”
[땅집고] “여기 어디 사세요?”라는 질문에 주민들은 잠시 망설인다. “숭인동이요”라고 답하면 되지만, 상대는 대개 이렇게 되묻는다. “아, 동묘요?” 서울 종로구 한복판에서 시작된 지하철 역 이름 논쟁은 그렇게 일상의 대화 속에서부터 시작됐다.
◇ “동묘는 상징일 뿐” 주민들이 꺼낸 불편한 이야기
지난 3일, 서울 지하철 1·6호선 동묘앞역 인근 숭인2동 주민센터에는 평소보다 많은 주민들이 모였다. ‘동묘앞역 역명 변경 주민간담회’라는 다소 딱딱한 이름의 행사였지만 현장 분위기는 예상보다 뜨거웠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주민들이 직접 추진위원회 구성을 논의하며 역명 변경 추진 방향을 공유했다. 낙산묘각사 법관스님과 인하대학교 융합고고학과 복기대 교수도 뜻을 모았다.
동묘앞역은 2000년 12월 서울 지하철 6호선 개통과 함께 문을 열었고, 1호선 역사는 2005년 12월 신설됐다. 역 이름은 인근 동관왕묘(東關王廟)에서 따왔다. 이곳은 중국 촉나라 장수 관우의 소상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중국에서는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되는 시기 ‘삼국지연의’가 널리 읽히며 관우 신앙이 유행했고, 이러한 풍조가 조선에도 전해졌다. 동묘는 임진왜란 이후인 1601년(선조 34년) 완공됐으며, 명나라 만력제가 친필 현판과 건축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는 1963년 동묘를 보물 제142호로 지정했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복 교수는 “동묘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와 함께 들어온 중국 상인들이 재신(財神)으로 여긴 관우를 모시며 시작된 곳”이라며 “아픈 역사를 되새기는 차원을 넘어, 지역의 대표 얼굴인 역명에 중국 상인의 신을 모시는 명칭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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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묘’ 상권 인지도 VS ‘숭인’ 생활권 정체성
현장 인근 상인들은 ‘동묘’라는 이름이 만든 상권 인지도를 꺼냈다. 반면 주민들은 ‘숭인’이라는 생활권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이번 논쟁의 핵심은 단순한 명칭 변경을 넘어 ‘이 동네를 무엇으로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가까워 보였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동묘앞역이라는 이름이 여전히 낯설고 못마땅하다는 반응도 적지 않다. 행정구역은 분명 숭인동인데, 역 이름 때문에 지역 인식이 왜곡된다는 것. 숭인동에서 20년 넘게 거주했다는 이모(61)씨는 “동묘는 특정 문화재 이름일 뿐 동네를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며 “마을의 역사와 정체성을 제대로 담아내는 이름이 좋다”고 말했다. 인근 주민 김모(48)씨 역시 “숭인역이 어감도 훨씬 자연스럽다”며 “이곳에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동묘보다 숭인동이라는 이름이 더 삶에 가깝다”고 했다. 반면, 동묘벼룩시장 인근에서 옷을 판매하는 상인 서모(54)씨는 “동묘라는 이름 덕분에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도 사실”이라며 “이미 널리 알려진 이름을 굳이 바꿀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쇼미더머니10’의 불협화음이라는 노래에 출연한 이찬혁이 랩 속 “명품보다 동묘 앞 할아버지 할머니 패션”이라는 가사가 유행하기도 했다.
◇ 이름 하나 바꾸는데 20년 넘게 걸리는 현주소
역명 변경은 단순히 주민들이 원한다고 해서 바로 되는게 아니다. 자치구 지명위원회 검토를 시작으로 서울시 지명위원회 자문, 최종 행정 결정까지 여러 절차를 거쳐야 한다.
실제로 동묘앞역 이름을 숭인역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꾸준히 이어져 왔다. 지난 2005년과 2008년에도 종로구의회는 역명을 숭인역으로 개명하자는 건의안을 채택한 바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역명이 바뀌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분위기가 다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주민들이 직접 추진위원회를 구성하며 공론화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문헌 종로구청장은 “종로는 단순한 행정구역을 넘어 민족의 정체성이 담긴 곳”이라며 “그 가치를 제대로 살리고 미래세대까지 이어가는 것은 중요한 책무”라고 했다. /ks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