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5.09.18 14:38 | 수정 : 2025.09.18 15:02
[땅집고] 전세 소멸이 요즘 화두다. 부동산학계에서 전세 소멸론이 나온 것은 어제오늘이 아니다. 아마도 그 담론이 본격화된 이유는 외환위기 즈음인 것 같다. 소매금융의 일종인 주택담보대출 상품이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할 때다. 외환위기 이전만 해도 수출 대기업이 자금을 몰아주느라 소비자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어려웠다. 이 같은 금융 억압에 집주인들은 세입자 금융을 통해 돌파구를 찾았다. 전세는 집주인이 세입자로부터 돈을 빌리는 일종의 사적 모기지 성격이 강하다.
제도권 모기지가 발달하면 ‘후진국형 사금융’인 전세도 운명을 다할 것이라는 논리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예측은 빗나갔다. 전세 소멸이 생각보다 늦어진 이유는 뭘까. 개인적으로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 전세소멸 속도 더디지만, 다가오는 월세시대
첫째, 전세 대출이다. 2009년부터 시작된 전세 대출은 전세 수요를 확산시켰다. 월세보다 전세 대출을 이용하는 편이 임대료 부담이 훨씬 작다. 세입자에겐 전세는 깡통전세 위험이 있긴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유리할 것이다. 한국주택금융공사가 지난해 5000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전월세 가구 80.5%가 전세를 희망한다고 답했다. 전세 대출은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전세 가격을 끌어올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금융업계에선 현재 전세 대출이 2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추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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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아파트 갭투자 유행도 전세 유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갭투자는 자본이득을 얻기 위해 전세 끼고 투자하는 투자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전세는 자연스럽게 공급됐다. 무엇보다 가격 상승 기대가 큰 아파트 시장에서 활기를 띠는데, 아파트에서 전세가 여전히 핵심 임대차로 남아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서울을 비롯한 대다수 아파트값이 크게 오르자 갭투자 수요는 더욱 늘었다.
아파트 공급 확대를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우리나라 총 주택 중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65.3%로 전년 대비 2.2% 증가했다. 빌라나 다세대 주택 등 비(非) 아파트 임대차 시장은 이미 월세로 대거 전환되었다.
◇ 빠른 월세화, 서민에게 위협적…의료·교육 복지 시스템 송두리째 바꿔야
셋째, 자녀가 결혼할 때 전세 보증금을 지원하는 연복지(緣福祉), 즉 네트워크 복지도 한몫한 것 같다. 과거 농경시대에서는 부모는 자식을 성년으로 키워 혼인시킬 때 먹고 살 수 있도록 논밭을 떼어줬다. 그리고 부모의 노후는 자식이 책임졌다. 부모와 자식이 부양과 봉양을 서로 주고받는 방식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부모가 가진 논밭이 없으니 대신 전세 자금을 마련해준다. 일각에선 보증금은 부모가 일부 보태주고 월세는 자녀가 부담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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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전세가 이젠 월세로 급속히 대체되고 있다. 사회적 이슈가 된 빌라 전세 사기가 전세 소멸의 기폭제가 된 것 같다. 여기에 전세대출 축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월세 시대가 열리면서 세입자의 주거 고비용 구조가 고착화할 수 있다. 외국 샐러리맨들의 월세 부담은 소득의 30~50% 선이다. 우리나라라는 그 정도는 아니다. 전세 제도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주택금융공사 조사결과 지난해 우리나라 보증부월세 거주 가구의 월세는 평균 38만원, 순수월세 가구는 월 63만원을 각각 부담한다. 집값이 비싼 서울 지역의 아파트 월세는 평균 109만원이다. 이는 5년 전인 2020년 84만원에 비하면 30% 가까이 오른 것이다.
빠른 월세화는 저소득층에게 더 위협적이다. “월세 사는 사람들은 마음대로 아플 수도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치료하기 위하 모아놓은 돈이 있어야 아플 수 있지 않느냐는 하소연이다. 월세 시대는 내 집 마련으로 어려워지는 주거 사다리가 흔들린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전세금을 모으고 그것을 밑천으로 삶의 작은 공간이라도 장만하고 싶은 서민들에겐 언감생심이 될 수 있다. 가뜩이나 줄고 있는 중산층이 더욱 얕아지고 계층 간 양극화, 사회 불안이 더 심해질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월세 시대를 마냥 반길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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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세 시대를 맞으려면 의료, 교육, 주거 등 복지 시스템을 송두리째 바꿔야 한다. 저렴한 공공임대주택도 선진국 수준으로 많이 지어야 하고, 주거 바우처 제도 역시 크게 확대해야 한다. 그래야 세입자의 주거 안전망이 강화될 수 있다. /글=박원갑KB국민은행부동산수석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