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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시간을 먹고 자란다...재건축, 속도보다 중요한 것?[기고]

  • 글= 유상근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재건축 추진단장

    입력 : 2025.09.02 09:00 | 수정 : 2025.09.02 09:35

    [기고]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재건축이 결코 느리지 않은 이유 | 유상근 올림픽선수촌아파트 재건축 추진단장

    [땅집고]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라고 말했던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표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건축의 본질을 꿰뚫는다. 눈에 보이는 형태와 구조를 넘어 건축은 철학이자 예술이며, 동시에 한 시대의 정신을 담는 거대한 그릇이다.

    그러나 그릇이 아름답게 빚어지기 위해서는 뜨거운 불길만큼이나 오래된 인내가 필요하다. 조급함은 결코 위대한 건축을 낳지 않는다.

    [땅집고] 여덟번째 기적으로 불리는 이탈리아 피렌체 대성당. 흑사병과 경제난을 이겨내고 150년에 걸쳐 완성됐다. /조선DB

    우리는 종종 도시의 한가운데서 혹은 세계적 축제의 무대 위에서 새로 태어난 건물들을 보며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를 묻는다. 그러나 세계의 건축사와 역대 거장들의 걸작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속도는 결코 느린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내의 전형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서울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역시, 당시 일부 대중의 시선 속에서는 ‘느리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해당 단지가 한국 현대 건축사에서 독자적 의의를 갖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단기간의 속도보다 시대적 요구와 건축적 완성도의 균형을 고민한 건축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

    ◇“시간이야말로 건축의 동반자”…로마의 건축가들이 가르쳐준 것

    기원전 1세기, 로마 제국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Vitruvius)는 그의 저서 ‘건축 10서’에서 건축의 세 가지 덕목을 말했다. 견고함(Firmitas), 유용성(Utilitas), 아름다움(Venustas). 이 셋 중 어느 하나라도 결핍되면 건축물은 생명력을 잃는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결코 하루 아침에 완성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로마의 콜로세움을 10년 이상, 판테온을 수십 년에 걸쳐 완성한 것은 단순한 기술 부족이 아니라, 시대와 공간에 맞는 비례와 조화를 찾기 위한 치열한 수고의 결과였다.

    또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궁정 건축가였던 아폴로도로스(Apollodorus of Damascus)는 트라야누스 시장과 포룸, 다뉴브 강의 다리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를 수년, 때로는 10년 이상에 걸쳐 완성했다. 그는 단순히 건축물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정치적·문화적 위상을 공간으로 구현하기 위해 시간과 공을 들였다.

    이러한 로마의 건축 전통은 훗날 르네상스의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 바로크의 베르니니(Bernini)와 보로미니(Borromini)에게까지 이어졌다. 피렌체 두오모의 거대한 돔을 16년에 걸쳐 완성한 사실, 베르니니의 산피에트로 광장을 수년에 걸쳐 설계·시공한 사실은, 시간이야말로 건축의 동반자라는 점을 웅변한다.

    ◇예술적 철학과 건축주의 의지… 인내의 시간은 ‘건축의 생명선’

    세계사의 건축 명작들은 하나같이 시간이 많이 걸렸다. 프랑스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1163년 착공 이후 180여 년 동안 계속 확장·수정되었고, 스페인의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1882년 착공 후 지금까지도 완공되지 않았다. 가우디(Antoni Gaudí)가 “나의 고객은 서두르지 않는다”고 말했듯, 위대한 건축은 시간과의 싸움이 아니라 시간과의 대화 속에서 완성된다.

    여기에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이야기를 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돔 설계를 맡으며,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수십 년간 끊임없이 도면을 수정하고 구상을 다듬었다. 그의 손길이 닿은 시스티나 성당 천장은 불과 4년에 완성되었지만, 그 4년은 매일 10시간 이상, 목과 허리를 꺾으며 보내야 했던 인고의 세월이었다. 그 치열한 몰입과 집중은 ‘시간의 밀도’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예술적 철학과 건축주의 의지, 건축은 기술자의 손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건축주의 철학, 시대의 미학, 그리고 설계자의 예술 감각이 맞물려야만 비로소 한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걸작이 탄생한다. 로마 시대의 트라야누스 포룸이나 판테온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단순히 석재와 콘크리트의 내구성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의도와 철학’이 건물의 뼈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인내의 시간, 건축의 생명선, 위대한 건축물에는 늘 ‘대기’의 시간이 존재한다. 로마의 수로(Aqueducts)가 수십 년 동안 건설된 것처럼, 현대 건축도 각종 인허가 절차, 구조 안전 검토, 디자인 수정, 재료 선정 등 수많은 단계에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 시간은 ‘지연’이 아니라 ‘숙성’에 가깝다. 마치 잘 숙성된 와인이 깊은 풍미를 내듯, 충분한 시간은 건축물의 완성도를 높인다.

    건축사에서 조급함이 낳은 결과는 늘 부정적이었다. 무리한 공기 단축은 구조적 결함을 낳았고, 미학적 완성도를 떨어뜨렸으며, 결국 건축물의 수명을 단축시켰다. 반대로, 로마의 판테온이나 피렌체 두오모처럼 시간을 아끼지 않은 작품들은 수백 년을 견뎌냈다.

    [땅집고] 유상근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재건축 추진단(올재단) 단장

    ◇미래에 각광받을 건축…단순한 ‘새 아파트’ 아닌 ‘충분한 시간을 들여 완성한 아파트’

    앞으로의 부동산 시장과 도시 환경에서는 조급하게 지어진 아파트 단지보다 느리게, 그러나 치밀하게 설계와 시공 과정을 거친 단지가 오히려 각광을 받을 것이다. 속도를 이유로 완성도를 희생한 건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를 드러내지만, 충분한 검토와 시공 과정을 거친 단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단순히 ‘새로운 아파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들여 완성한 아파트’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런 단지야말로 향후 수십 년 동안 안전성과 미학, 그리고 주거 만족도를 동시에 제공할 수 있다. 건축의 역사와 거장들이 증명하듯, 느리게 지어진 건축물은 오래 살아남는다.

    건축가들은 벽돌과 콘크리트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디자인한다. 로마의 아폴로도로스가 트라야누스 시장의 기둥을 세울 때, 베르니니가 산피에트로 광장의 타원형 공간을 설계할 때, 가우디가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첨탑을 그릴 때, 미켈란젤로가 돔의 곡선을 다듬을 때, 그들은 공간의 비례만큼이나 시간의 흐름을 고려했다. 그 속도는 재촉이 아니라 기다림이었고, 그 기다림 속에서 건축물은 더욱 완전해졌다.

    서울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또한 당시의 속도에 맞선 균형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다시금 ‘느림의 건축’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를 되새겨야 할 때다. 건축은 그 자체로 시간을 응축한 예술이다. 로마의 건축가들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교훈은 “급하게 지은 건물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는 속도를 숭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속도만으로는 결코 영원한 아름다움을 만들 수 없다.

    서울 올림픽선수촌 아파트는 느린 것이 아니라, 인내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 건축이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음을 보여준 기념비였다. 비트루비우스와 아폴로도로스, 브루넬레스키, 베르니니, 미켈란젤로, 가우디가 그랬듯, 우리 또한 ‘시간이 만든 건축’이야말로 진정한 걸작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건축은 시간이 빚는 예술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글=유상근 올림픽선수촌아파트 재건축 추진단장, 정리=박기람 땅집고 기자 pkra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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