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5.06.05 06:00
[기고] 공공성을 재해석하다: 지역 특성화 임대주택 | 유상근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재건축 추진단장

[땅집고] 주거는 단순한 쉼터 그 이상이다. 인간은 삶의 대부분을 특정 지역과 공동체 내에서 살아간다. 그만큼 주거는 지역성과 사회적 역할을 함축하는 플랫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임대주택 정책은 주거의 기능에만 집중했고, 지역과의 연계나 사회적 환류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그 결과 공공임대는 종종 낙인효과를 동반했고, 지역의 활력을 높이기보다는 오히려 고립된 공간으로 변질되기 일쑤였다. 이제 우리는 임대주택의 공급 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할 시점에 와 있다. 지역 특성에 부합하는 '기여형 임대주택' 모델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성수동을 떠올려보자. 과거 수제화 산업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최근 젠트리피케이션을 겪으면서 전통 산업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의 역사성과 정체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만약 이곳에 장인·명장들을 위한 임대주택을 공급하고, 이들이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수제화 체험이나 제작 시연 같은 커뮤니티 활동에 일정 시간 이상 참여하도록 유도한다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 단순히 주거를 지원하는 것을 넘어, 지역 정체성을 회복하고 주민 간 유대감을 강화하며 관광 및 체험 기반 경제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사실 이러한 모델은 전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유럽의 일부 도시는 이미 지역 예술가, 전통 산업 종사자, 사회복지 전문가들을 위한 맞춤형 주거 지원을 통해 지역 활력과 공공성을 동시에 높이고 있다. 이제 서울도 이런 접근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
올림픽선수촌 아파트는 더욱 상징적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주 무대였던 이곳은 체육인의 삶과 기억이 녹아 있는 공간이다. 현재 이 단지는 재건축을 준비 중이다. 우리는 단순히 주택을 고급화하고 가격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는 대신, 도시 전체의 정체성과 미래를 고민해야 한다.
예를 들어, 88올림픽의 유산을 계승해 역도 영웅 장미란, 피겨여왕 김연아, 배구 여제 김연경 등 은퇴한 체육인이나 지도자에게 일정 비율의 임대주택을 공급하고, 이들이 커뮤니티 내에서 지역 청소년을 대상으로 체육 수업이나 생활체육 지도를 맡도록 설계한다면 어떨까? 이러한 모델은 단지 체육인의 복지에 그치지 않는다. 지역 청소년에게는 질 높은 체육 활동 기회를 제공하고, 주민들은 건강한 여가 문화를 누리며, 단지 전체는 건강·활력·공공성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차별화된 브랜드 가치를 얻게 된다.
기여형 임대주택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정책'이다. 우리는 특정 직군이나 기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무상 또는 저가로 주택을 제공하고, 그 대신 지역 사회에 일정 정도 환류하도록 유도한다. 단순히 조건 없이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호혜적인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지속가능성과 수용성이 높다. 공공부문의 재정 부담도 상대적으로 줄어들며, 주민들의 거부감도 완화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 모델이 자발성과 공동체 기반 위에서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강제로 의무를 부과하는 대신, 참여의 유인을 제도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이를 통해 자긍심과 공동체 소속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참여자의 활동을 커뮤니티 포인트로 환산해 지역 내 복지 서비스나 문화 행사에 사용할 수 있게 한다면 선순환 구조가 가능해진다.
정책을 설계할 때, 우리는 반드시 해당 지역의 맥락과 자원을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성수동이라면 수제화, 익선동이라면 한옥과 전통공예, 올림픽선수촌이라면 체육이라는 고유한 문화 자산이 존재한다. 우리는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을 존중하고, 이를 바탕으로 주거 정책을 펼쳐야 한다. 또한 임대주택의 디자인, 커뮤니티 시설의 배치, 참여 프로그램의 구성 역시 지역 맞춤형으로 기획해야 한다.
예산 측면에서도 우리는 무조건적인 추가 부담을 지지 않는다. 기존의 공공임대 예산 중 일부를 기여형 임대주택으로 전환하거나, 민간의 사회공헌기금과 도시재생사업비를 결합해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 특히 재건축·재개발 과정에서 기부채납 형태로 확보된 커뮤니티 시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공간적 제약도 해결할 수 있다.
이렇게 지역 특화형 임대주택이 확산하면, 우리의 도시는 더 이상 ‘주거 격차’의 공간이 아니라 ‘공동체 회복’의 장으로 변화할 수 있다. 단지 저소득층을 위한 공간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사회적 기능과 문화적 가치를 담은 주거 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나는 앞으로도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재건축을 통해 이러한 모델을 실현하고자 한다. 체육인의 전문성이 지역사회에 환류되고, 주민 간 교류와 신뢰가 자라나는 아파트와 도시, 국가를 꿈꾼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이 서울 곳곳에, 나아가 대한민국 전역에 확산되길 바란다.
결론적으로, 공공임대는 더 이상 단일한 정책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서울은 동시다발적으로 다양한 문화와 직업,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복합체다. 우리는 이 복합성을 수용하고 확산하는 임대주택 모델, 바로 지역 특성화 기반의 기여형 임대주택을 통해 새로운 공공정책의 비전을 실현할 수 있다. /글= 유상근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재건축 추진단장, 정리=pkra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