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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은 스카이라인 예술인데…" 서울서 랜드마크 없다는 불만 나온 이유 [기고]

  • 글=유상근 올림픽선수촌 재건축 추진단장

입력 : 2025.04.14 11:45 | 수정 : 2025.04.17 09:30

[기고] 도시의 수직성ㆍ덩어리감, 서울 아파트 배치를 보는 또 다른 시선

[땅집고] 서울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 배치는 ‘텐트형’ 구성이 오랜 기간 이어져 왔다. 이는 아파트 동(棟)들의 배치를 벌려서 삼각형 또는 부채꼴처럼 퍼뜨리고, 높이의 차이를 둬가며 배치함으로써 ‘덩어리감(mass)’을 줄이려는 시도다. 시각적으로 압도하는 느낌을 줄이고, 보다 ‘열린 도시’의 인상을 주려는 목적이다.

[땅집고] 유상근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재건축 추진단(올재단) 단장.

이 시도는 도시에서의 거주 쾌적성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다. 도시계획의 관점에서도 일견 타당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른 도시철학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스카이라인을 만들어낸 글로벌 도시들을 살펴보면, ‘덩어리감’은 억제해야 할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도시의 얼굴’이라는 점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도시의 덩어리감’은 압박감이 아니라 ‘아이덴티티’다. 뉴욕의 맨해튼, 홍콩의 센트럴, 싱가포르의 마리나 베이… 이들 도시는 모두 고층 건물들을 밀도 있게 집약한 도시공간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시야를 압도할 만큼의 덩어리감은 오히려 그 도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이며, 방문객에게는 일종의 ‘기념비적 스케일’로 받아들여진다.

홍콩의 고층 주거단지들은 산자락을 따라 수직으로 솟아 있어 야경에서는 마치 인공적인 협곡처럼 보인다. 싱가포르의 HDB 블록 역시 집약적이되 다양하게 조합한 외형을 통해 리듬감 있는 스카이라인을 연출한다. 맨해튼은 고층건물의 거대한 ‘덩어리’들이 거리를 따라 질서정연하게 정렬돼 있다. 그 자체로 도시의 아이덴티티를 시각화한 결과물이다.

이들 도시가 덩어리감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수용하고 적극 활용했다는 점은, 서울이 고민해야 할 또 하나의 도시미학이다. 수직성의 미학과 ‘사람 눈높이’의 조화가 중요하다. 덩어리감을 줄이려는 이유는 결국 사람의 눈높이에서의 시각적 피로, 또는 답답함을 해소하고자 하는 데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높이’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 높이를 어떻게 디자인하고, 거리와 시야각에서 어떻게 인식되는 가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싱가포르는 고층 건물 사이의 거리 확보, 저층부의 개방감 있는 필로티 구조, 곳곳에 배치된 수직정원과 스카이브리지 등을 통해 상하 시야각에 여유를 부여한다. 맨해튼은 고층 빌딩들 사이에 명확한 거리감을 부여한다. 블록 단위의 계획을 통해 ‘가까운 건물’과 ‘먼 건물’을 명확히 구분한다. 덩어리감은 존재하지만, 시각적 압박을 조절한 것이다.

서울 역시 같은 접근이 가능하다. 덩어리를 줄이는 대신, 덩어리 사이의 간격, 저층부의 투명도, 그리고 인접 공공 공간의 개방성을 활용해 시각적 해소감을 줄 수 있다. 덩어리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도시계획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텐트형 배치의 한계는 공간의 비효율과 경관의 무의미를 극대화한다는 점이다. 텐트형 배치는 동간 거리를 넓게 벌려 ‘시야 확보’라는 효과는 얻을 수 있다. 반면 정작 도시공간의 효율성과 스카이라인의 연속성을 해친다는 단점도 안고 있다. 각 동이 벌어질수록 생기는 중간 공간들은 종종 애매한 공터로 남고, 도시의 리듬감은 깨진다.

게다가, 높은 위치에서 도시를 내려다보았을 때 텐트형 배치의 단지는 도시적 미학에서 분절된다. ‘낮고 넓게 퍼진 건물의 바다’는 도시의 아이덴티티를 약화할 수 있다. 밤이 되면 고층 건물의 외벽에 조명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장관은 사라지고, 흩어진 불빛만이 도심을 채운다.

‘야경’은 단순히 조명의 문제만이 아니다. 건물의 높이와 밀도, 외형, 반복과 변주의 리듬, 그리고 도시 전체를 하나의 캔버스로 보는 설계 철학이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생겨나는 도시 예술이다. 텐트형 배치는 이 예술적 연출을 애초에 포기해버리는 방식이다.

고층화의 새로운 접근을 위해서는 무작정 높이지 말고, ‘의미 있게’ 높여야 한다. 서울은 이미 고밀도 도시다. 중요한 건, 고밀도를 어떻게 지혜롭게 다룰 것인가다. 텐트형으로 낮고 퍼지게 만드는 것은 일시적인 시각 해소 효과는 줄 수 있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도시 스케일의 축소, 개별 단지의 고립, 그리고 도시 스카이라인의 무너짐을 초래할 수 있다.

대신, 고층화와 덩어리감을 받아들이되, 저층부의 커뮤니티 중심 설계, 수직적 공공 공간 도입, 동간 간격에 리듬을 둔 배열, 시각적인 조형미를 반영한 입면 디자인 등으로 사람 눈높이에서의 도시 쾌적성을 보완하는 방향이 필요하다. 이는 단순한 배치도상의 문제를 넘어서, 도시 전체를 예술작품으로 다루는 시각이자, 서울이 진정한 글로벌 도시로 발돋움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서울은 이미 세계적인 도시다. 문제는 ‘그 도시가 어떤 얼굴을 가지기를 원하는가’이다. 덩어리감은 무조건 줄여야 할 부정적 요소가 아니다. 잘 설계하고 조율한 덩어리감은 도시의 개성과 존재감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이제 단순히 시야를 넓히는 방식이 아닌, 시야의 깊이와 높이, 원근과 밀도를 함께 고려하는 도시계획을 고민할 때다. 서울이 미래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갖추려면, 시야의 해방이 아닌, 시각의 감동을 추구해야 한다. 서울의 하늘에 또 하나의 아름다운 ‘덩어리’가 들어서는 날을 기대하며. /글= 유상근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재건축 추진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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