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5.03.29 06:00
[기고] 85㎡ 족쇄를 풀어야 ‘진짜 국민주택’이 탄생한다 | 유상근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재건축 추진단장

[땅집고] 한국의 아파트 시장은 오랜 시간 동안 획일성과 대량생산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돼 왔다. 그 중심에는 바로 ‘국민주택 규모’라는 기준이 자리한다. 현행 법령상 국민주택 규모를 85㎡ 이하로 규정하고 있다. 공공택지에서의 분양 우선권, 세제 혜택, 청약 제도 등 여러 정책적 혜택이 이 기준을 중심으로 설계한다.
그러나 이 85㎡라는 숫자가 지금도 ‘국민’을 위한, 시대에 부합하는 기준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 규제가 지속될수록 국민의 주거 선택권은 제한되고, 다양화된 수요에 역행하는 공급이 고착화될 수밖에 없다.
노태우 정부 시절의 기준이 아직도 유효한가? 국민주택 규모 85㎡ 기준은 1988년 노태우 정부 시절 ‘주택 200만 호 건설 계획’과 함께 등장한 개념이다. 당시 정부는 주택보급률이 60% 수준으로 심각한 부족 상태였기에 가능한 한 많은 국민에게 최소한의 주거 공간을 제공해야 했다. 이에 따라 ‘작지만 효율적인’ 주택을 대량으로 공급하기 위해 85㎡ 이하를 국민주택으로 규정하고 각종 지원을 집중했다.
그런데 36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 2023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은 약 3만6000달러에 달하고, 주택보급률은 100%를 넘었다. 가족의 형태도 다변화되었고, 주거에 대한 기대치 또한 높아졌다. 과거에는 단순한 ‘잠자리’였던 집이 이제는 여가, 재택근무, 자녀 교육, 반려동물과의 생활 등 복합적인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85㎡ 이하만을 ‘국민’의 주택으로 규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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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 중심 사회로의 전환에 주택 면적은 따라가지 못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민들의 여가 시간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재택근무와 원격 수업의 보편화로 인해 많은 이들이 집에서 일하고 배우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이제 거실, 주방, 침실 외에 서재나 홈오피스, 취미 공간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러나 현행 주택공급 정책은 여전히 ‘좁지만 다 들어간’ 평면만을 권장하며, 더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수요를 외면하고 있다. 국민들의 생활 수준은 높아졌지만, 집은 여전히 30여 년 전 기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곧 주택 수요와 공급 간의 괴리를 의미하며, 실수요자들이 만족할 만한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적 원인 중 하나다.
획일적 주택 공급이 시장 왜곡을 만든다. 아파트 시장이 지나치게 ‘소형 평형’ 중심으로 기획되고 공급되면, 중대형 평형에 대한 수요는 제한된 공급 속에서 가격 상승으로 이어진다. 이는 중산층의 주거 사다리를 오히려 차단하고, 더 넓은 공간을 원하는 실수요자들이 외곽지역으로 밀려나게 만든다.
특히 자녀가 둘 이상인 4인 가구나 3세대 동거 가구의 경우, 85㎡ 이하의 공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이들은 결국 청약 가점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입주 가능한 주택이 부족하여 선택지를 잃는다. 실제로 수도권의 많은 신축 아파트 단지에서 84㎡가 가장 큰 평형으로 기획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는 정책적 한계와 시장의 안전추구 심리가 결합한 결과다.
이처럼 규격화된 아파트 구조는 다품종 소량생산을 지향해야 할 오늘날의 주거 시장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국민들의 라이프스타일은 천차만별인데, 주택의 ‘틀’만이 고정되어 있다면 이는 국민의 생활 만족도를 낮추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국민주택’의 재정의가 필요하다. 지금은 국민주택의 개념을 다시 정의해야 할 시점이다. ‘85㎡ 이하’라는 획일적 기준이 아니라, 시대에 맞는 수요 기반의 면적 다양화를 고려해야 한다. 오히려 정책은 공급 구조의 유연성과 평면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를 통해 1인 가구, 신혼부부, 다자녀 가구, 고령자 가구,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가구 등 다양한 삶의 형태에 맞는 주거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주택 설계와 공급에 있어서 ‘소비자 맞춤형’ 접근이 필수적이다. 자동차는 이미 수십 가지 옵션을 조합해 소비자의 취향에 맞게 제작되고 있는데, 왜 집은 여전히 획일화된 구조로만 공급되는가? 집 또한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과 가족 구성, 가치관에 맞게 설계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선 정책의 틀부터 유연해져야 한다.
다품종 소량생산의 주택 공급으로 나아가야 한다. 현대 주거정책은 ‘품질’과 ‘맞춤화’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대량생산, 획일화된 평형의 공급 방식은 이제 그 수명을 다했다. 오히려 다품종 소량생산, 즉 다양한 평면과 면적, 설계가 공존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방향은 건설사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자 기회이며, 소비자에게는 더 나은 삶의 질을 보장하는 토대가 될 것이다.
정부는 이제 ‘85㎡ 이하’라는 숫자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국민의 삶의 방식과 변화된 환경에 걸맞은 새로운 주거 기준을 고민해야 한다. 진정한 국민주택은, 더 이상 면적이 아니라 국민의 삶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형태와 기능으로 정의해야 한다./글=유상근 올림픽선수촌 재건축 추진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