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5.03.30 06:00

[땅집고] 3월 중순, 수십억원짜리 아파트가 밀집한 용산역 일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쓰러져가는 한 아파트를 찾았다. 서울 강변북로 바로 옆에 위치한 중산시범이다. 1970년 준공한 만큼, 대충 봐도 상당한 연식이 느껴진다. 외벽 페인트는 언제 칠했는 지 가늠조차 어렵고, 벽 곳곳에 금이 갔다. 단지 뒤편은 셀 수 없이 많은 전선이 거미줄처럼 늘어져 있었다.
서울 대표 부촌인 용산구 이촌동에 있으나, 서울시 소유 부지에 지어져 재건축이 어려웠던 중산시범아파트가 정비사업을 위해 시유지 매입에 나서고 있다. 무너지기 직전인 이 아파트가 한강변 신축 아파트로 탈바꿈할 수 있을 지 관심이 쏠린다.

■ 55년 방치된 아파트, 정비사업 위한 첫 절차 나선다
30일 서울시, 정비업계 등에 따르면 서울시와 중산시범아파트 재건축 조합설립추진위원회(추진위)는 토지 대금 납부 방안을 놓고 협의 중이다. 시가 지난해 말 추진위 측에 면적 4695.5㎡에 대한 감정평가금액 1092억원을 통보하면서 일시불 납부를 제안했는데, 추진위 측이 분할 납부를 요청하면서 세부 사항을 조율하게 된 것이다.
서울시 공유재산 및 물품 관리 조례 36조에 따르면 시유지 매각 대금은 최대 10년 이내 기간으로 분할 납부가 가능하다.
앞서 추진위는 2021년 용산구를 통해 서울시에 토지 매수신청서를 제출, 토지를 매입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서울시는 이듬해 시유지 6개 필지에 대해 조건부 매각을 결정했다. 3.3㎡(1평) 당 7700만원 수준으로, 인근 재개발 구역 시세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다. 이 금액은 2023년 감정평가 받은 것으로, 올해 6월까지 유효하다. 중산시범 소유자의 토지 매입 찬성비율은 94%다.
중산시범의 경우 1개 필지 위에 1개 동이 세워진 형태라서 동별로 해당 필지를 구매해야 한다. 납부금액은 동과 대지지분에 따라 다르다. 가장 작은 면적인 39㎡ 가구의 대지지분은 14.91㎡(4.51평), 전용면적 59㎡ 가구당 대지지분은 22.36㎡(6.76평)다. 이에 따른 중산시범 가구 당 분담금은 3억2954만원~5억1704만원이다.

■ 알짜 중 알짜 중산시범, 재건축 못 했던 이유
중산시범은 전용면적 39~59㎡, 6개 동, 266가구 규모다. 1968~1970년 서울시 공영주택 사업의 일환으로 인근 시범, 시민아파트와 함께 지어졌다. 당시 이촌동에 조성된 아파트 중 가장 평수가 커서 중산층을 위한 시범아파트라는 의미로 ‘중산시범’이 됐다.
이 아파트는 단지 앞으로 한강과 여의도, 바로 뒤편으로 용산국제업무지구가 있어서 알짜 중에서도 알짜로 꼽히는 곳이다. 재건축만 하면 시세가 평당 1억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1996년 안전진단 ‘D등급’을 받은 지 30년이 지난 현재까지 조합 설립도 못 했다. 서울시 땅에 지어진 ‘토지임대부’ 주택으로, 사실상 재건축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아파트 소유주는 건축물에 대한 권리만 가진다.

■ ‘그 때 샀다면’ 종이 한 장에 바뀐 아파트 운명
토지를 매수할 기회는 있었다. 다만, 바로 옆 단지에서 발생한 한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없던 일이 됐다.
1980년대 중반, 중산시범 옆 북한강 성원아파트 자리에 있던 시민아파트의 경우 한 주민이 1960년대 아파트 분양 당시 토지 대금 지불 영수증을 발견하면서 토지 소유권을 확보했다. 서울시는 이 영수증과 분양 광고 등을 근거로 토지 소유권이 아파트 주민에게 있다고 보고, 소유권을 이전해줬다. 시민아파트는 재건축을 마치고 2001년 북한강 성원아파트가 됐다.
중산시범의 경우 분양계약서에 ‘아파트, 대지 분양가격을 납부해야 소유권 이전이 가능하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영수증이 발견된 사례가 없다. 이로 인해 서울시를 상대로 제기한 토지 소유 반환 소송에서도 패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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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서부이촌동 A부동산 관계자는 “과거에는 손으로 모든 행정을 다 처리하다 보니 서류를 제대로 보관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면서도 “이후에 서울시가 땅 사용료 등을 주민들에게 시달했을 당시라도 땅을 샀어야 한다”고 했다.

■ 물 새고 연탄 떼던 곳, 서울에서 가장 싼 아파트 됐다
연식이 오래된 만큼, 아파트 가격은 시세보다 현저히 낮다. 중산시범 전용 59㎡ 매매 호가는 9억3000만원부터인데, 지난 7년 동안 거래된 적이 없다. 2017년 전용 59㎡가 4억4500만원에 팔린 것이 마지막 거래다. 같은 평형 전세는 2억2000만원부터 나와 있다.
월세도 서울 원룸보다 저렴하다. 올해 3월 전용 49㎡는 보증금 1억3000만원, 월세 17만원에 세입자를 들였다. 그야말로 서울에서 가장 싼 아파트다.
중산시범 아파트 거주했던 이모씨는 “84년부터 10년가량 거주하던 중 재건축을 추진한다고 해서 이사를 나갔었는데, 30년 넘게 진척이 없다”고 했다. 이어 “살던 당시에는 연탄을 쓰던 아파트였다”며 “장마철이 되면 물이 많이 새서 쓰레받기로 퍼 날랐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westseou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