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2.10.05 08:15
[땅집고] 서울 종로구 익선동은 서울 도심에서도 보기 드문 고즈넉한 분위기에, 리모델링한 한옥과 단독주택이 들어서 있고 젊은층이 선호하는 ‘힙’한 식당과 카페도 많아 방문객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장소이다.
헌데 고만고만한 높이의 건물 사이로 우뚝 솟은 아파트가 눈에 들어온다. 이 동네 유일한 아파트이자 최고 9층, 총 291가구 규모의 나홀로 단지인 ‘현대뜨레비앙’이다. 그런데 최근 이 아파트 외벽에 거대한 현수막이 내걸리기 시작했다. 현수막에는 ‘공원녹지 훼손하는 건물 신축이 웬말인가!’, 유일한 휴식공간 공원부지 사수하자!’, ‘땅투기로 변질된 공개공지, 국토부가 주시한다!’ 등 문구가 적혀 있다. 대체 이 아파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2003년 입주한 ‘현대뜨레비앙’은 부동산 개발업체인 ‘팬퍼시픽’이 과거 경기 침체로 자금난을 겪던 금호그룹으로부터 150억원에 넘겨 받은 부지에 지은 아파트다. 당시 팬퍼시픽은 종로구청으로부터 용적률 인센티브를 받아 이 아파트를 최고 9층으로 건축했다. 단지 바로 앞에 ‘공개공지’를 마련하는 조건이었다.
공개공지란 일정한 대지 내에서 건물을 세우지 않고 일부러 남겨 놓은 일정한 터를 말한다. 상시 개방해 일반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다. 현행법에 따르면 건축시 공개공지를 설치하는 경우, ▲해당 지역에 적용하는 용적률의 1.2배 이하 ▲또는 해당 건축물에 적용하는 높이 기준의 1.2배 이하의 범위에서 규제 완화 적용을 받을 수 있다.
‘현대뜨레비앙’ 입주자들에 따르면 팬퍼시픽은 종로구청에 공원을 성실하게 관리하겠다는 각서를 제출하고, 공탁금으로 5000만원도 냈다. 그런데 2004년 팬퍼시픽이 이 땅을 추가 개발하고자 종로구청을 상대로 공개공지 결정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2006년 대법원이 ‘공개공지의 지상에는 건축행위를 할 수 없다’고 판결하면서 팬퍼시픽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종로구청은 공탁금으로 공개공지에 현재의 소규모 공원(서울 종로구 와룡동 152 일대)을 조성했다.
다 끝났다고 여겼던 이 문제는 공개공지의 소유주가 변경되면서 다시 불거졌다. 2017년 이 땅을 공매로 낙찰받은 새 소유주 A씨가 최근 5층 높이 건물을 신축할 계획을 세우고, 종로구청에 건물 신축을 위해 공개공지를 변경해달라는 내용으로 도시·군관리계획 관련 입안을 제안한 것이다. 현행 국토계획법에 따라 주민제안이 들어오면 종로구가 타당성 여부를 판단하고, 입안 반영 여부를 정하게 된다.
이 소식을 접한 ‘현대뜨레비앙’ 주민들은 공개공지를 사수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당초 대법원이 공개공지로 유지해야 한다는 판결을 냈던 땅인 만큼, 종로구청이 A씨의 신축을 적극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아파트 바로 앞에 5층 규모 건물이 들어서는 경우 일조권·조망권이 크게 침해당할 것이라고 염려하는 입주민들도 적지 않다.
입주민들은 “서울시가 시민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도심에 녹지를 확보하려는 정책을 펼치고 있는 상황인데, 종로구청은 있는 공원도 없애려고 한다”, “당초 ‘현대뜨레비앙’이 공개공지를 조성하는 조건으로 용적률 인센티브를 받은 아파트인데, A씨가 공개공지를 없앤다면 아파트가 곧 불법 건축물이 되는 꼴이니 어불성설 아니냐”는 등의 의견을 펼치고 있다.
다행히(?) 종로구청은 공개공지를 지금처럼 유지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확인됐다. 종로구청 관계자는 땅집고와의 통화에서 “공개공지 소유주인 A씨의 개발 의지는 이해하지만, 공개공지 인근 주민들 의견을 수렴하고 관련 부서 및 전문가들, 서울시와 여러 차례 협의한 결과 A씨가 제안한 공개공지 변경안은 입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며 “토지 소유자에게는 이 같은 종로구청의 의사를 전달한 상태”라고 했다.
‘현대뜨레비앙’ 관리사무소장은 “입주민들이 단지 앞 공원녹지를 매우 애용하고 있는 만큼, 종로구청에 공개공지를 사수해달라는 주장을 강력하게 전달했다”며 “다만 추후 종로구청의 결정이 번복되는 등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현수막은 떼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경공매 전문가인 이영진 이웰에셋 대표는 “개발 여지가 전혀 없는 부지를 단독으로 낙찰받아간 A씨의 결정은 사실 전문가 입장에선 쉽게 납득가지 않는다. 짐작컨대 입찰 전 종로구청에 문의했다가 ‘건물 신축 가능할 수도 있다’는 식의 모호한 답변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본다”라며 “만약 경공매 물건에 대한 법원기록서나 감정평가서 등 자료에서 중대한 하자를 발견한 경우, 낙찰 후 7일 이내에 매각불허가 신청하면 낙찰 사실을 취소할 수 있다”고 했다. /이지은 땅집고 기자 leejin0506@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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