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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기부·집주인 다 확인했는데…"사기 당하셨어요"

입력 : 2019.04.05 04:00

지난달 2일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에 “신혼부부와 젊은이들이 부동산 사기극 때문에 거리로 쫓겨 나오게 되었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경기 안산에 사는 청원인은 지난해 6월 딸 신혼집으로 8000만원에 오피스텔 전세 계약을 맺었다가 8개월 후 이 계약이 사기였던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실제 집주인은 따로 있고 부동산중개사무소의 중개보조원이 내세우는 가짜 집주인과 전세계약을 맺었다는 것이 청원 내용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청와대 홈페이지 캡쳐

경찰에 따르면 사건에 가담한 중개보조원은 위임장 없이 허위 계약서로 임차인과 전세계약을 체결한 후 집주인에게는 월세계약을 맺었다고 속이고 보증금을 가로챈 것으로 밝혀졌다. 사기당한 피해자만 177명, 피해 금액도 총 65억원에 달했다.

피해를 입은 임차인들은 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해 집주인과 개별적인 소송에 나서고 있지만 승소 여부는 불투명하다. 피해자 A씨는 “주변에서 돈도 돌려 받기 힘들고, 사기꾼들은 몇 년만 살다 나오면 60억원 가량의 돈으로 평생 먹고 살 수 있다는 말도 있다”며 “평생 모은 돈을 날릴 것이란 생각에 너무 절망스럽다” 고 했다.

최근 집없는 서민 대상으로 수십억대 전세보증금 사기 사건이 잇따르면서 사회 문제로 비화할 조짐이다. 하지만 정부는 관련 법 미비를 이유로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다. 땅집고는 전세금 사기 사건이 왜 반복되고 있는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심층 분석해봤다.

■ 목숨까지 앗아간 이중계약 사기, 왜 반복되나

전세 보증금 사기와 관련해 언론에 보도된 피해 규모만 해도 연간 수십억원대를 웃돈다. 올 1월 서울 강남에서 아파트 이중계약 사기로 총 20명에게 보증금 50억원 가량을 빼돌린 부동산업자 김모(46)씨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으로 한 피해자 가족이 목숨을 끊기도 했다. 지난해 8월에는 경남 창원에서 한 공인중개사가 ‘전월세 이중계약’ 수법으로 150명에게 총 68억원의 전세보증금을 가로챈 혐의로 구속됐다. 최근 2~3년 서울 도봉구와 충북 충주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전세보증금 사기 수법. /김리영 기자

전·월세 사기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① 중개인이 거래에 대한 모든 정보를 독점

업계에서는 오피스텔 처럼 보증금이 많지 않은 부동산은 중개인(공인중개사 등)에게 계약 업무를 맡기는 관행이 있다. 이 때문에 임차인이나 임대인 모두 거래 상대방의 신원이나 정상 거래 여부를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위임받지 않았는데도 위임받았다고 속이고 거래를 진행하거나 당사자 간 대면 기회를 원천 차단하는 식의 수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전세 사기 피해자인 임차인 B씨(30)는 “중개인이 집주인이 멀리 사는 할아버지라서 계약 현장에 오기 힘들다”며 “집주인 할아버지가 곧 대리인C씨에게 소유권을 이전할 예정이어서 이 C씨와 계약을 해도 괜찮다고 말하며 실제 집주인의 연락처를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공인중개사를 믿고 등기부등본·집주인 신분증 등의 서류를 확인한 후 계약했다. 그러나 실제 집주인은 위임한 사실이 없었고, 이 집이 1년 간 공실인 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집주인 D씨는 “부동산 중개인이 월세 세입자가 들어왔다고 했지만 계약서를 주지 않아 직접 집에 찾아가봤지만 문이 닫혀있었고 함부로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며 “자신의 집에 사는 임차인 정보를 확인해주는데 부동산이 비협조적이었다”고 했다.

② 계약서·신분증·대리인 위임증 등의 위조 여부를 일반인이 알기 어렵다

임차인 B씨가 계약 당시 연락했던 집주인의 대리인은 알고보니 공범이었다. 이렇게 가짜 대리인을 내세우기 위해 각종 문서를 위조하는 것도 단골 수법이다. 경찰에 따르면 이번 안산 오피스텔 사건의 경우 대부분의 임차인들이 위조한 위임장을 믿고 집주인의 계좌가 아닌 중개사 계좌로 보증금을 이체시켰던 것으로 드러났다. 계약서에 적혀있던 연락처는 ‘없는 번호’였고, 핸드폰도 ‘대포폰’이었다.

2014년부터 작년 2월까지 서울 강남에서 전월세 이중계약 사기행각을 벌인 부동산중개인 역시 집주인의 인감도장을 위조해 대리인 행세를 하면서 임차인들을 속였다. 이처럼 문서를 위조할 경우 임차인이 진위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사기에 쉽게 휘말릴 수밖에 없다.

■ 전문가들, 전월세 신고 의무화 등 정책 변화 있어야

전문가들은 전월세 사기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실거래가 신고 의무화’ 제도를 도입하거나 ‘부동산 전자계약’ 활성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 전세 보증금을 집주인이 아닌 제 3 의 기관에 예치해 두는 에스크로(Escrow) 제도를 일부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매매거래와 달리 전월세의 경우 실거래 신고가 의무사항이 아니다. 국토교통부는 현재 임대 소득에도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전월세 신고 의무제도를 도입하려는 계획이 있지만,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다.

부동산거래관리시스템 홈페이지 캡쳐. /국토교통부

김진유 경기대 도시교통학과 교수는 “외국에서는 세입자 보호 취지로 실거래 신고 의무화·에스크로 제도 등을 운영하고 있다”며 “특히 에스크로의 경우 우리나라는 전세보증금이 집주인의 투자금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아 전면 도입이 어렵더라도 오피스텔이나 원룸 등에는 먼저 적용하는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제도적인 보완도 필요하지만, 전세 사기를 막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당사자인 집주인과 세입자가 직접 만나 신분증으로 신원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중개업소에서 어떤 이유에서라도 “집주인이 계약 현장에 오지 못한다”고 하면 위임장을 반드시 확인하고, 집주인과 통화해 녹음이라도 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전세보증금은 중개사 계좌가 아닌 집주인 계좌로 이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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