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0.10.25 13:43
?오늘의 중국: 趙南起(조남기)와 上甘嶺(상감령)
▶ 2000/10/24
안녕하세요. 정웅기 기자입니다.

중국이 6·25전쟁 개입(10월19일) 50주년을 대대적으로
지호전(遲浩田·츠하오톈) 국방부장을 단장으로 한 중국
고위군사대표단20여명이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주로 군 장성들로
중국 공산당이 전쟁에 개입한 주요 명분은 아시다시피
항미(抗美)였습니다. 그런데 중국 고위군사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하던
시기에, 공교롭게도 당시의 적대국가인 미국의 국무장관 올브라이트
여사가 평양을 방문해 세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요. 자연히
중국 군사대표단에 대한 북한의 대접은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구요.
국익 앞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군요.
제가 다시 항미원조 전쟁을 주제로 삼는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조선족 출신 조남기(趙南起·74·자오난치) 장군 때문이고, 둘째는
상감령(上甘嶺) 전투 때문입니다. 먼저 여러분께 이실직고할 일은
18일자 글에서 영화'상감령'을 '감령에 올라'라고 했는데, 확인해보니
상감령은 강원도 김화군 오성산 남방의 지역 이름이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전국 정협 부주석(부총리급)인 조남기 장군은 조선족 출신으로는
가장 출세한 사람입니다. 충북 청원이 고향인 그는 12살때 부모를
따라 만주로 간 뒤 군에 투신, 6·25전쟁에 참여했고 그 후 인민해방군
상장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올 4월 62년만에 고향인 충북 청원을
다녀갔습니다. 우리는 그를 같은 동포로, 한 고향사람으로 여겨
열렬히 환영했지요.
최근 그가 '중국국방보(中國國防報)' 기자와 항미원조 전쟁에 대해
대담을 나눴습니다. 대담기사에 나타난 그는 '중국인'일
뿐이었습니다. 한민족(韓民族)의 후예로서, 동족끼리 죽고죽이는
비극이나 선조의 땅이 피비린내 나는 전장터가 돼 민족 전체가 고통을
받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질 않았더군요. 오로지 중국의
관점에서만 6.25전쟁을 평가했습니다.
그는 50년 10월19일 중국인민지원군 1차 전투부대중 일원으로
팽덕회(彭德懷:펑더화이)사령관을 수행해 압록강을 건넜고, 58년
마지막 중국군 부대에 소속돼 철군해 전쟁의 전과정에 참여했습니다.
물론 전투요원이 아니라 물자 보급 등을 맡은 후근부에서 근무했지요.
그는 항미원조전쟁이 ▲ 미국이 강요한 전쟁이고, ▲ 미국의 침략에
맞서 국가와 평화를 지키기위해 참여한 전쟁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면서 항미원조 전쟁을 위대한 승리로 부르는 이유로, 평화를 위한
전쟁이었다는 등 7가지를 꼽더군요. 우리의 인식과는 차이가 있어
일일이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그가 중공군의 개입 배경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습니다. "당시 미군과 한국군은 중국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38선을 넘었고, …(중략)…, 나아가 '역사상 압록강은 중국과
조선의 국경선이 아니었다'라고 큰소리로 허풍을 떨며 공공연히
창끝을 중국으로 향했다."
'역사적으로 압록강이 중국과 조선의 국경선이 아니었다'란 것이
허풍인가요? 그렇다면 한때 만주나 요동벌판을 호령했던 고조선,
고구려, 발해국 등은 무엇일까요. 중국 역사서에도 나오는 엄연한
사실인데. 이같은 한민족(韓民族)의 역사를 알만한 조선족 출신
지도자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고, 그의 입장에서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다음으로 상감령 전투에 대해서입니다. 중국은 6.25전쟁에서
승전보를 울린 최대의 격전지로 '상감령 전투'를 꼽고 있습니다. 이를
기리기위해 '상감령'이란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중국 군은 자신들의 전사에서 삼감령 전투가 1952년 10월14일에서
11월25일(중국군 주장)에 이르는 40일간의 격전으로, 당시 유엔군과
한국군의 '김화공세'를 격퇴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상감령 전투'는 우리 국방부가 편찬한'6.25전사'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볼 때 강원도 김화읍 북쪽에 있는
오성산 남방의 상감령 지역에 있는 몇몇 요충적인 고지를
탈환하기위한 벌인 공방전을 말하는 듯 합니다.
우리 국방부의 6.25전사는 이 시기 전투를 중공군과 인민군이 철원
김화 등 '철의 삼각지'를 중심으로 벌인 마지막 '추계 대공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 등이 이 때 벌어졌지요.
같은 전투를 두고 공격의 주체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정전협정이 진행되던 이 시기는 각 전선에서 양측의 전력이 팽팽히
맞서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고지탈환전에 수십만의 병력이 투입되고,
고지의 주인이 밤낮으로 수십차례 바뀌었습니다. 어떤 고지는 이기고,
어떤 고지는 뺐기고…. 2년여의 전쟁 중 영웅적 희생사례와 무용담이
가장 많이 양산된 전투가 바로 이 시기에 이뤄졌답니다.
하지만 우리측과 중국측의 전사(戰史)를 보면 전투 이름에서부터
전투 결과에 이르기까지 서로 기록이 일치하지 않아 정확한 평가가
어려웠습니다. 양쪽 모두 적군 피해가 아군보다 많았습니다.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왜 이렇게 기록이 서로 다를까요?
저는 이번에 상감령 전투를 알아보기위해 양측의 전사를 뒤지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역사의 진실은 누가 기록하고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었고, 둘째는 인간을 파괴하는
전쟁의 비극은 이 땅에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한다는
신념입니다./鄭雄基드림 jungwk@chosun.com
■ 중국어 한마디
5年後中國電話用戶數將躍居世界第一位.
Wu(3)nian(2)hou(4) Zhong(1)guo(2) dian(4)hua(4) yong(4)hu(4)shu(4)
jiang(1) yue(4)ju(1) shi(4)jie(4) di(4)yi(1)wei(4).
5년 뒤 중국의 전화 사용자(가입자) 수는 일약 세계 제 1위가 될
것입니다./중국망(中國網:www.cww.com) 10월 23일 보도
오기전(吳基傳:우지촨) 정보산업부 장관이 21일 거행된 '2000
중국서부논단'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2005년이 되면 실내·휴대
전화의 전화망 및 그 사용자 수가 세계 최고가 될 것이랍니다. 올해
9월까지 전국 전화 사용자 수가 2억명을 돌파했습니다. 이중 실내전화
가입자는 1억3500만, 휴대전화 가입자는 6500만이랍니다.
중국의 전자정보산업 시장규모는 90년대 초와 비교해 8배나
확대됐으며, 전자제품 수출량은 대외무역 총액의 20%에 이른답니다.
내년 초쯤 중국이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면 발전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 2000/10/24
안녕하세요. 정웅기 기자입니다.

중국이 6·25전쟁 개입(10월19일) 50주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중국
지호전(遲浩田·츠하오톈) 국방부장을 단장으로 한 중국
고위군사대표단20여명이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주로 군 장성들로
꾸며졌습니다. 중공인민지원군 열사묘에 참배하기 위해서랍니다.
중국 공산당이 전쟁에 개입한 주요 명분은 아시다시피
항미(抗美)였습니다. 그런데 중국 고위군사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하던
시기에, 공교롭게도 당시의 적대국가인 미국의 국무장관 올브라이트
여사가 평양을 방문해 세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요. 자연히
중국 군사대표단에 대한 북한의 대접은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구요.
국익 앞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군요.
제가 다시 항미원조 전쟁을 주제로 삼는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조선족 출신 조남기(趙南起·74·자오난치) 장군 때문이고, 둘째는
상감령(上甘嶺) 전투 때문입니다. 먼저 여러분께 이실직고할 일은
18일자 글에서 영화'상감령'을 '감령에 올라'라고 했는데, 확인해보니
상감령은 강원도 김화군 오성산 남방의 지역 이름이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전국 정협 부주석(부총리급)인 조남기 장군은 조선족 출신으로는
가장 출세한 사람입니다. 충북 청원이 고향인 그는 12살때 부모를
따라 만주로 간 뒤 군에 투신, 6·25전쟁에 참여했고 그 후 인민해방군
상장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올 4월 62년만에 고향인 충북 청원을
다녀갔습니다. 우리는 그를 같은 동포로, 한 고향사람으로 여겨
열렬히 환영했지요.
최근 그가 '중국국방보(中國國防報)' 기자와 항미원조 전쟁에 대해
대담을 나눴습니다. 대담기사에 나타난 그는 '중국인'일
뿐이었습니다. 한민족(韓民族)의 후예로서, 동족끼리 죽고죽이는
비극이나 선조의 땅이 피비린내 나는 전장터가 돼 민족 전체가 고통을
받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질 않았더군요. 오로지 중국의
관점에서만 6.25전쟁을 평가했습니다.
그는 50년 10월19일 중국인민지원군 1차 전투부대중 일원으로
팽덕회(彭德懷:펑더화이)사령관을 수행해 압록강을 건넜고, 58년
마지막 중국군 부대에 소속돼 철군해 전쟁의 전과정에 참여했습니다.
물론 전투요원이 아니라 물자 보급 등을 맡은 후근부에서 근무했지요.
그는 항미원조전쟁이 ▲ 미국이 강요한 전쟁이고, ▲ 미국의 침략에
맞서 국가와 평화를 지키기위해 참여한 전쟁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면서 항미원조 전쟁을 위대한 승리로 부르는 이유로, 평화를 위한
전쟁이었다는 등 7가지를 꼽더군요. 우리의 인식과는 차이가 있어
일일이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그가 중공군의 개입 배경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습니다. "당시 미군과 한국군은 중국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38선을 넘었고, …(중략)…, 나아가 '역사상 압록강은 중국과
조선의 국경선이 아니었다'라고 큰소리로 허풍을 떨며 공공연히
창끝을 중국으로 향했다."
'역사적으로 압록강이 중국과 조선의 국경선이 아니었다'란 것이
허풍인가요? 그렇다면 한때 만주나 요동벌판을 호령했던 고조선,
고구려, 발해국 등은 무엇일까요. 중국 역사서에도 나오는 엄연한
사실인데. 이같은 한민족(韓民族)의 역사를 알만한 조선족 출신
지도자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고, 그의 입장에서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다음으로 상감령 전투에 대해서입니다. 중국은 6.25전쟁에서
승전보를 울린 최대의 격전지로 '상감령 전투'를 꼽고 있습니다. 이를
기리기위해 '상감령'이란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중국 군은 자신들의 전사에서 삼감령 전투가 1952년 10월14일에서
11월25일(중국군 주장)에 이르는 40일간의 격전으로, 당시 유엔군과
한국군의 '김화공세'를 격퇴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상감령 전투'는 우리 국방부가 편찬한'6.25전사'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볼 때 강원도 김화읍 북쪽에 있는
오성산 남방의 상감령 지역에 있는 몇몇 요충적인 고지를
탈환하기위한 벌인 공방전을 말하는 듯 합니다.
우리 국방부의 6.25전사는 이 시기 전투를 중공군과 인민군이 철원
김화 등 '철의 삼각지'를 중심으로 벌인 마지막 '추계 대공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 등이 이 때 벌어졌지요.
같은 전투를 두고 공격의 주체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정전협정이 진행되던 이 시기는 각 전선에서 양측의 전력이 팽팽히
맞서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고지탈환전에 수십만의 병력이 투입되고,
고지의 주인이 밤낮으로 수십차례 바뀌었습니다. 어떤 고지는 이기고,
어떤 고지는 뺐기고…. 2년여의 전쟁 중 영웅적 희생사례와 무용담이
가장 많이 양산된 전투가 바로 이 시기에 이뤄졌답니다.
하지만 우리측과 중국측의 전사(戰史)를 보면 전투 이름에서부터
전투 결과에 이르기까지 서로 기록이 일치하지 않아 정확한 평가가
어려웠습니다. 양쪽 모두 적군 피해가 아군보다 많았습니다.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왜 이렇게 기록이 서로 다를까요?
저는 이번에 상감령 전투를 알아보기위해 양측의 전사를 뒤지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역사의 진실은 누가 기록하고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었고, 둘째는 인간을 파괴하는
전쟁의 비극은 이 땅에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한다는
신념입니다./鄭雄基드림 jungwk@chosun.com
■ 중국어 한마디
5年後中國電話用戶數將躍居世界第一位.
Wu(3)nian(2)hou(4) Zhong(1)guo(2) dian(4)hua(4) yong(4)hu(4)shu(4)
jiang(1) yue(4)ju(1) shi(4)jie(4) di(4)yi(1)wei(4).
5년 뒤 중국의 전화 사용자(가입자) 수는 일약 세계 제 1위가 될
것입니다./중국망(中國網:www.cww.com) 10월 23일 보도
오기전(吳基傳:우지촨) 정보산업부 장관이 21일 거행된 '2000
중국서부논단'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2005년이 되면 실내·휴대
전화의 전화망 및 그 사용자 수가 세계 최고가 될 것이랍니다. 올해
9월까지 전국 전화 사용자 수가 2억명을 돌파했습니다. 이중 실내전화
가입자는 1억3500만, 휴대전화 가입자는 6500만이랍니다.
중국의 전자정보산업 시장규모는 90년대 초와 비교해 8배나
확대됐으며, 전자제품 수출량은 대외무역 총액의 20%에 이른답니다.
내년 초쯤 중국이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면 발전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이라는 전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