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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본 100년/국내] 식민지시대의 슬픈 유산 공창

입력 : 1999.02.03 15:20




## 개항후 일본서 유입…2차대전 중엔 '정신대'로 깊은 상처 ##.

♧ 일제 통치는 한국 근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여럿 남겨 놓
았다. 그중 여성의 처지에서 보면 공창의 도입과 이로 인한 매매춘의
확산도 일제가 남긴 폐해의 하나로 지적할 수 있다.

한반도에 매춘을 전업으로 하는 오늘날의 매춘부가 들어온 것은 1876
년 병자수호조약 이후 일본인이 들어오면서부터.

유곽이 처음 생긴 곳은 부산이었다. 1902년 7월 일본인 거류지 바로
옆에 문을 연 '미도리마치'(녹정·현재의 완월동)가 시조다. 이어 인천
원산 서울 대구 청진 목포 대전 등지로 번졌다. 한일합방이 되던 1910
년에는 11개 이상의 도시에 유곽이 들어섰다. 1910년 창기의 수는 일본
인 851명, 한국인 569명으로 일본인이 다수를 차지했으며, 5년 후에는
일본인 3713명, 한인 1271명으로 급속히 팽창했다.

1920년대에는 백인 매춘부도 등장했다. 1922년 12월 30일자 동아일보
는 '로서아추업부래성'이란 제하의 기사 아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명
의 러시아 20대 여성이 들어왔다"고 보도했다.

1920년대 사창가는 오늘날 대부분의 사창가에서 볼 수 있는 쇼윈도
구조로 돼 있었다. 당시에는 이를 '장점'으로 불렀는데, 도로에서 투시
할 수 없게 건물구조를 지정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얼굴을 보이고 손
님을 끌어들이는 것은 풍기상 좋지 못하고 아무리 창기라도 온갖 조롱
을 받는 것은 인도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1921년 7월 이를 폐지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장점 폐지를 철회하라는 포주들과의 실랑이 끝에 타
협으로 나온 것이 실물 대신 사진을 걸어놓는 것. 이 타협책은 같은 해
9월부터 일제히 시행에 들어갔다.

공창에서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명암은 엇갈렸다. 1929년 한 햇동안
유곽을 찾은 유객수와 유흥비 총액을 창기 수로 나누어보면, 일본인 창
기들은 매일 0.7명의 유객을 상대해 5원47전을 번 반면, 조선 창기는
0.2인을 받아 87전을 벌었다. 일본 매춘부들이 상대적으로 부유한 일본
인들을 상대한 반면, 조선 매춘부들은 사회 하층의 노동자들을 주로 상
대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타와 질병에 시달리고, '인육' '썩어진 고기덩이' 등으로
불리며 천대당해야 했다. 학대에 견디다 못해 삭발 파업을 하거나 자살
하는 여성들도 속출했다. 1931년에는 청진의 창기 12명 중 11명이 아사
동맹을 맺어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기사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도 조선인 창기 수는 급격히 늘었다. 1차 세계대전 등으
로 인한 불경기로 생활고가 극에 달하자 매춘을 택하는 조선 여성들이
많아졌다.

1925년 2805명이던 조선의 창기와 작부 수는 1931년도에는 무려 5073
명으로 급증했다. 반면 일본인은 4085명에서 4361명으로 소폭 증가에
그쳤다. 조선 여자들의 사회적 빈곤과 실업이 얼마나 심각하였나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 창기들의 처참한 생활상에 분개한 사회단체들이 공창 폐지 운
동을 펴기도 했다. 공창폐지기성회, 혁청단, 근우회, 각 지역 청년단체
등이 공창 폐지를 주장하고 서명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폐창 운동은 근
본적으로 성공할 수 없었다. 1935년 1월 1일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유곽
밖출입을 허용키로 한 것이 폐창 운동이 이룬 작은 결실이었다. 총독부
는 공창도 통치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독립운동가나 공
산주의자들이 유곽을 은신처로 삼고 있다고 판단, 주기적으로 무장 경
관까지 동원해가며 유곽 수색을 벌였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위안부란 이름으로 공창이 공급됐다. 8·15 종전
당시 30만의 일본군이 한국에 주둔해 있었는데, 그때까지 주둔지에는
모두 큰 유곽이 설치돼 있었다. 중일전쟁 당시 육군오락소 문앞에는'성
전의 용사 대 환영' '몸도 마음도 모두 바치는 충성스런 일본 여성의
서비스' 등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일제의 공창은 태평양전쟁중이던 1944년 정신대란 이름으로 악명을
더했다. 조선 여성 7만∼8만명이 전선에서 참혹한 대접을 받으며 위안
부 생활을했다. 일본의 일부 우익 관료들이 "정신대는 공창이므로 한국
인 차별이 아니었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지만, 한국 여성 대부분
이 강제 연행당했다는 점에서 망언에 불과할 뿐이다. 해방 후 미 군정
은 일제의 공창 제도를 없애기 위해 공창폐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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