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1998.01.04 19:11

## 키 작은 사연 ##.
박정희가 대통령 시절에 직접 썼던 '나의 소년시절'은 이렇게 계
속된다.
[학교에 가지고 간 도시락이 겨울에는 얼어서 찬밥을 먹으면 나
는 흔히 체해서 가끔은 음식을 토하기도 하고 체하면 때로는 아침밥
을 먹지 않고 가기도 하였다. 이럴 때는 하루 종일 어머니는 걱정을
하신다. 그러나 그 당시 시골에는 소화제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며
칠 동안 밥을 먹지 못하면 이웃집의 침장이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거
기에 가서 침을 맞았다. 이상하게도 그 침을 맞으면 체증이 낫는 것
같았다. 나의 왼손 엄지 손가락 뿌리에는 지금도 침을 맞은 자국이
남아서 빨갛게 반점이 남아 있다. 이 반점을 보면 지금도 어머니 생
각과 이웃집 침장이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사진설명 :
박정희가 태어난 생가 옆으로 풀짐을 나르는 큰 형 박동희의 모습.
허리를 굽히고 있어 상대적으로 집에 크게 보인다. 처마 밑에 주렁주렁
달린 가마니는 닭들이 알을 낳던 '닭집'이엇다. 사진 우측에 살짝 보이는
방문이 박정희가 쓰던 공부방. 삽작문 뒤로 보이는 초가지붕은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와 그의 장남 박재석이 살던 집이다. 1962년경의 사진.
어린 박정희의 엄지 손가락 뿌리에 침을 놓아 준 침장이 할아버
지는 바로 박정희의 아버지 박성빈의 둘도 없는 술친구 김병태였다.
그는 한학에 조예가 깊어 동네에서는 한학자로 알려져 있었다. 박성
빈과 함께 밤마마을의 주막에 앉아 함께 한시를 짓고 창을 즐겼으며
침술에도 능했다. 선산 김씨인 김병태의 손자뻘 되는 김재학(71·박
정희 생가 보존회 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동네 사람들은 응급조치
를 대부분 김병태의 침으로 해결했다"고 한다. 그의 집은 박정희의
생가 바로 아래에 자리했으나 지금은 어린이 놀이터로 변하고 말았
다.
박정희가 말하는 엄지 손가락 뿌리의 침 자국은 엄지와 검지가
갈라지는 부분으로 합곡이라 말하는 유명한 체침 자리다. 어린 박정
희를 등에 업고 김병태 노인의 침술에 자주 의존했던 어머니 백남의
는 그때마다 박정희를 임신했을 때 유산하려 몸부림친 일에 대해 적
잖은 가책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백남의가 막내에 대해서 유달리
사랑을 쏟은 데에는 그런 미안함에 기인하는 바도 적지 않았을 것이
다.
[우리 형제들이 다들 체구가 건장하고 신장도 큰 편인데 나만이
가장 체구가 작은 것은 이 보통학교 시절에 원거리 통학으로 신체발
육에 큰 지장을 가져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아버지 박성빈의 키가 대략 1m70㎝ 정도였고 셋째 아들 박상희가
그보다 약 10㎝가 더 컸다고 하니 박정희의 집안사람들은 기골이 컸
다고 할 만하다. 박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가끔 "내가 그때 하루 40리
길을 걸으면서 얼어붙은 도시락을 먹고 자주 체하곤 했으니 키가 이
렇게 될 수밖에…"라고 말하곤 했었다. 박정희의 키가 작은 이유로
서는 태아시절 어머니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쉴 사이 없이 받았던 점
도 들수 있을 것이다.
[한없이 평화스럽지만 가난한 나의 고향, 가끔 학교에 가져가야
할 용돈이 필요하면 어머니가 한푼 두푼 모아두신 1전짜리 동전, 5
전 10전짜리 주화를 궤짝 구석에서 찾아내어 나에게 주신다. 한달
에 월사금(수업료)이 그당시 돈으로 60전이었다. 매월 이것을 납부
하는 것이 농촌에서는 큰 부담이었다. 특히 우리집 형편으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어머니께서는 한푼이라도 생기면 나의 학비를 위해서
모아 두신다. 때로는 쌀을 몇되씩 팔아서 모아 두신다. 계란 1개가
1전이었다고 기억이 난다. 형들이 달라면 없다 하시고 알뜰히 알뜰
히 모아두신다. 어머니는 담배를 좋아하셨다. 때로 담배가 떨어져도
나의 학비를 위해 모아두신 돈은 쓰실 생각을 아예 안하신다.]
생가의 원래 모습을 촬영해 둔 사진에는 초가 지붕 밑에 가로로
주렁주렁 달려 있는 세장의 가마니를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이 집
을 드나들던 박성빈의 손자 박재석(75·전 국제전기 회장)은 이 가
마니를 '닭집'으로 불렀다고 한다. 마당에서 놀던 대 여섯 마리의
암탉들이 날개를 퍼득이며 올라가 가마니 위에서 알을 낳곤 했다는
것이다. 백남의는 매일 계란을 모았다.
[때로는 학교에 가져 가야 할 돈이 없으면 계란을 몇개 떨어진
양말짝에 싸서 주신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학교 앞 문방구점에 가
면 일본인 상점 주인이 계란을 이리 저리 흔들어 보고 상한 것 같지
않으면 1개 1전씩 쳐서 연필이나 공책(노트)과 교환하여 준다. 이
계란을 들고 가다가 비오는 날이나 얼어서 빙판이 된 날 같은 때는
미끄러져 넘어지면 계란이 팍삭 깨어져 버린다. 이런 날은 하루 종
일 기분이 언짢다.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말씀드리면 계란을 깨
었다는 꾸지람은 한 번도 하시는 법이 없다. "딱하지. 넘어져서 다
치지나 않았느냐"고 하실 뿐이다.]
1,2학년과 5,6학년때 우등상을 받았던 박정희가 질병으로 결석한
일수는 1학년때 18일, 2학년때 20일, 3학년때 16일이었다. 4학년 이
후에 건강상태는 좋아져 5학년 때 하루, 6학년 때 사흘을 결석했을
뿐이다. 구미공립보통학교 6학년 때인 1931년 박정희 소년의 키는
135.8㎝, 몸무게는 30㎏, 가슴둘레 66.5㎝로 발육상태 평가는 병이
었다. 박정희와 보통학교 동창생인 이진수(82·경북 구미시 송정동
향장)는 계란을 사모으던 문방구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문방구 주인이 일본사람이지요. 배가 불뚝하게 나와 우리는 '배
불띠기'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작은 하꼬방(판자집)같은 데서 문구
류를 갖다 놓고 팔았는데 연필 저급품이 1전, 고급품은 2전 했지요.
공책이 5전, 운동화는 한 켤레가 50전이나 했습니다. 에노그(그림물
감)도 팔았고 크레용도 갖다 놓곤 했는데 공책 살 돈이 없으면 우리
들은 하얀 백로지에 줄을 그어 쓰곤 했어요. 정희는 3학년때부터 급
장을 했습니다.".
작은 체구의 박정희는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땅따먹
기 놀이도 자주 했다고 한다. 작은 조약돌을 손가락으로 튕기고 뼘
을 크게 벌려 영토를 차지하는 놀이였다. 손이 작은 박정희는 이럴
때마다 키가 컸던 이진수를 불러 대신 뼘을 재어달라고 했다.
[어느 늦봄날이었다. 보통학교 2∼3학년 시절이라고 기억이 난다.
20리 시골길을 왕복하니 배도 고프고 봄날이라 노곤하기 그지 없었
다. 집에 돌아오니 정오가 훨씬 넘었다. 삽작에 들어서니 부엌에서
어머니께서 혼자서 커다란 바가지에 나물에 밥을 비벼서 드시다가
"이제 오느냐. 배가 얼마나 고프겠느냐"하시며 부엌으로 바로 들어
오라고 하시기에 부엌에 책보를 든 채 들어가 보니 어머니께서는 바
가지에 비름나물을 비벼서 막 드시려다가 내가 돌아오는 것을 보시
고 같이 먹지 않겠느냐고 하시기에 같이 먹었다. 점심때가 훨씬 넘
었으니 시장도 하지만 보리가 절반 이상 섞인 밥에 비름나물과 참기
름을 넣고 비빈 맛은 잊을 수가 없는 별미다. 나는 요즈음도 가끔
내자에게 부탁하여 비름나물을 사다가 비빔밥을 만들어 먹어 보곤한
다. 엄동의 추운 겨울에는 저녁을 먹고 나면 가족들이 한방에 모인
다. 세상사 여러 가지 이야기가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아버지와
형들이 한방에 모여 있으니 아버지가 계신 고로 형들은 담배를 피우
지 못한다. 아버지께서 눈치를 알아차리시고 슬그머니 사랑방으로
내려가신다. 형들에게 담배를 마음대로 피우도록 자리를 비워주시는
셈이다. 밤이 늦어지면 이야기도 한물 가고 모두들 밤참 생각이 난
다. 어머니께서 홍시나 곶감을 내어놓으실 때도 있고, 때로는 저녁
에 먹다 남은 밥에다가 지하에 묻어둔 배추김치를 가져와서 김치를
손으로 찢어서 밥에 걸쳐서 먹기도 한다. 이것이 시골농촌의 겨울밤
의 간식이다. 가끔은 묵을 내는 때도 있다.]
박대통령은 워낙 비름나물을 좋아하였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는
시장에서도 비름나물을 구할 수가 없었다. 박학봉 부속실장과 이광
형 부관은 할 수 없이 씨앗을 사 가지고 와서 청와대 본관 뒷동산에
작은 밭을 일구고 심었다. 이부관은 미끈미끈한 비름나물이 맛이 없
었으나 대통령은 고추장과 참기름을 보리 섞인 쌀밥에 비벼 다른 반
찬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맛있게 먹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가난했던
시절을 잊지 않으려고 비름나물 비빔밥을 먹는 것 같았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