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1997.04.08 17:34

장흥에는 들꽃가족이 산다. 엄마 아빠와 세딸, 모두 다섯
식구다. 큰 딸 은규(11)에게선 들꽃 향기가 풍기고, 현규(9)와 선규
(7)는 들꽃을 닮았다. 아빠 한건희씨(39)와 엄마 강미영씨(38)의 일터
인 장흥계곡 피자집「사슴의 집」이 이들 들꽃가족의 보금자리다.

었다. 축산학도 남편과 간호사출신 아내의 힘겨운 사슴사랑, 그러나 소
리없이 찾아온 참담한 실패. 사슴처럼 태어난 어린 딸들에게도 무거운
구름이 드리웠다. 부부는 농장을 팔고 사료창고 터에 피자집을 만들어
생계를 꾸려갔다.
『그 어렵고 힘들던 때 봄만 되면 뒷산엔 어김없이 들꽃이 피어나더
군요. 무심코 넘겼던 그 꽃들이 어느순간 우리 가족 모두의 마음속에 자
리를 잡았습니다.』.
그렇게 5년. 여유를 찾은 이들 가족이 주위를 둘러보자 어느덧
아름다운들 꽃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남편 한씨가 틈틈히 거둬온
들꽃 씨앗들이 가게 정원에서 피고, 집주위 여기저기에 혼자서 날아온 씨
앗들이 꽃을 피웠다. 한 포기도 뽑지않았다. 뒷산과 장흥골짜기도 들
꽃가족에겐 뒷마당이나 마찬가지.
장흥 골짜기 생태가 고산지대와 유사해 고산꽃들까지 잘 피었다.
뒷산 장군봉은 높지는 않지만 지세가 험해 진짜 희귀종 빼고는 없
는 꽃이 없었다. 자갈을 깐 주차장 옆 기슭엔 보랏빛 노루목이 피었고,
그 뒤로는 노란 복수초가 무리지어 피었다. 가게로 오르는 붉은 벽돌계
단석 틈새엔 도시에선 볼 수 없는 토종앉은뱅이 민들레가 잎을 펴고 있다.
부부는 『요놈들 때문에 계단 수선을 못한다』고 했다.
들꽃가족은 지난 해 뒷산에서 산작약을 찾아내고 주위에 울타리를
둘렀다. 이런 일을 할때면 세 딸은 야단법석이다. 아이들은 자주 가는
뒷산 길목에 엄마꽃 아빠꽃들을 다 정해 놓았다.
들꽃가족은 해마다 6월이면 들꽃을 주제로 한 야외 공연을 갖
는다. 광인 아빠를 위해서다. 해거름에 시작한 지난해 콘서트는
달이 뜨면서 절정에 달했다. 어른 아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제
는 달맞이 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