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농지 284만 필지 ‘위반 의심’ 분류
농촌 고령화·상속·관행적 임대 현실과 충돌
[땅집고] 정부가 농지 투기를 잡겠다며 사상 처음 전국 단위 농지 전수조사에 나서면서 고령 농민들의 생계형 농지까지 위협받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직접 농사를 짓기 어려워 이웃 농민에게 논밭을 맡기거나, 노후자산으로 농지를 보유해온 고령농까지 농지법 위반 여부를 따지는 조사 대상에 오르고 있다. 2024년 기준으로 65세 이상 농업경영주 비중은 69.7%에 달하고, 벼농사의 이앙·방제·수확 등 주요 작업 위탁 비중이 이미 60∼80%에 이른다. 현실을 외면한 탁생행정이 농민을 범법자로 만들고 농지가격을 폭락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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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1996년 이후 취득한 농지 약 136만㏊를 대상으로 이용 실태를 조사하고 있다. 조사 대상은 약 1049만 필지다. 이 가운데 284만 필지, 전체의 27%가 농지법 위반 가능성이 있는 심층조사 대상으로 분류됐다. 전국 농지 네 필지 중 한 필지 이상이 추가 확인 대상에 오른 셈이다.
다만 심층조사 대상이라고 해서 곧바로 농지법 위반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정부는 행정자료와 현장 확인 등을 통해 실제 경작 여부와 불법 임대차, 무단 휴경 등을 추가로 확인한다는 입장이다.
◇농민 절반이 70세 이상인데…직접 경작 원칙과 농촌 현실 괴리
문제는 지금 농촌의 현실이 현행 농지법이 전제로 한 ‘직접 경작’ 원칙과 크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농지법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 농지를 소유해야 한다는 ‘경자유전’을 기본 원칙으로 한다. 원칙적으로 농지를 소유한 사람이 직접 농사를 짓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은 제한된다.
하지만 농촌에서는 고령이나 질병으로 직접 농사를 짓기 어려워진 소유자가 같은 마을 농민에게 위탁식으로 논밭을 맡기는 일이 흔하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도시에서 생활하는 자녀가 농지를 상속받고, 직접 농사를 지을 수 없어 고향 주민에게 경작을 맡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계약서를 쓰지 않고 이웃끼리 농지를 맡아 경작하는 관행도 여전히 남아 있다. 법의 원칙과 실제 농촌의 농지 이용 방식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존재하는 셈이다.
특히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된 농촌에서는 농지를 직접 경작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투기성 보유와 같은 선상에서 판단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15일 국민의힘 정책위원회가 국회에서 개최한 ‘농지조사 후폭풍, 위기의 농촌’ 간담회에서도 이 같은 문제가 집중적으로 제기됐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평생 논밭 몇 마지기를 가꾼 어르신이 사정이 있어 농사를 짓지 못하면 투기라고 몰아붙인다”며 농지 전수조사가 고령 농민을 잠재적 투기꾼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는 농업 경영주의 절반 이상이 70세를 넘었고 40세 이하 젊은 농업인은 2.7%에 불과하며 임차농 비중은 45%에 달한다고 지적했다. 고령화가 심각한 농촌에서 모든 농지를 소유자가 직접 경작하도록 요구하는 데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반값에 내놔도 안 팔려”…처분 압박에 농지가격 폭락
농민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조사 이후 이어질 수 있는 처분 압박이다. 농지법 위반이 확인돼 처분의무가 부과될 경우 직접 경작하거나 농지를 처분해야 한다. 고령으로 농사를 짓기 어려운 소유자 입장에서는 기존 임대를 정리하거나 땅을 팔아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하지만 지방 농지 시장은 이미 거래가 크게 줄어든 상태다. 전국 농지 거래량은 2021년 29만5935필지에서 지난해 14만9230필지로 절반 수준까지 감소했다. ㎡당 평균 실거래가격도 같은 기간 8만1434원에서 5만3518원으로 약 34% 떨어졌다. 팔려는 사람은 늘어날 수 있는데 정작 농지를 살 사람은 부족한 구조다.
김지현 가남농협 조합장은 국회 간담회에서 “농지를 반값에 내놓아도 사지 않는다”며 “연세 드신 분들이 피땀 흘려서 노후자금으로 놔뒀던 건데 정부가 그마저도 하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농촌에서는 실제 농사를 짓지 않는 모든 농지를 같은 기준으로 볼 것이 아니라 투기를 목적으로 취득한 농지와 고령화·상속 등에 따라 불가피하게 임대한 농지를 구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고령농이 농지를 처분하거나 임대를 중단하면 실제 농사를 짓는 임차농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농지 소유자가 제재를 우려해 기존 임대차를 끊을 경우 농지를 빌려 규모를 키워온 농민이 경작지를 잃을 수 있어서다.
◇정부도 농지은행 유도…“단속보다 제도 현실화 먼저”
정부도 이런 문제를 의식해 농지은행을 통한 합법적인 임대차 전환을 유도하고 있다. 농지은행에 농지를 맡기면 일정 요건 아래 직접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적법하게 임대할 수 있다.
정부는 전수조사 과정에서 적발과 처분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일반적인 위반 사항에 대해서는 곧바로 처분하기보다 계도와 농지은행 위탁 등 적법한 방식으로 전환하도록 유도한다는 방침이다.
그럼에도 정치권과 농촌 현장에서는 조사에 앞서 농지 임대 제도부터 현실에 맞게 손봤어야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국민의힘은 고령농이 안정적으로 농업에서 은퇴하고 청년농 등이 농지를 활용할 수 있도록 농지은행 기능을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가 내년도 예산안에 편성한 농지은행 관련 예산 8868억원에 5000억원을 추가해 총 1조3868억원으로 늘리겠다는 계획이다.
임이자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농사를 그만두고 싶은 사람은 농지를 처분하지 못하고, 규모를 키우려는 청년농과 실경작자는 농지를 구하지 못하는 현실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농지 투기를 막고 실제 경작자를 보호한다는 전수조사의 취지에는 이견이 크지 않다. 다만 농촌 고령화와 상속, 관행적 임대차가 오랜 기간 누적된 상황에서 제도 정비 없이 조사와 처분부터 앞세울 경우 투기성 농지가 아닌 고령농의 생계형 자산까지 시장으로 내몰 수 있다는 지적이다. /mjba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