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집고] “4년 전 태풍으로 아파트가 완전 침수되면서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바람에 69층에 사는 입주민들도 계단을 타야 했어요. 앞으로도 자연재해로 어떤 피해가 발생할지 모르는데, 보상금이 고작 10만원이라니…”
2022년 9월 태풍 힌남노로 최악의 침수 피해를 겪었던 부산 서구 암남동 ‘힐스테이트 이진베이시티’ 아파트. 이 단지가 상습침수피해구역인데도 개발 과정에서 아파트를 자연재해로부터 ‘방재호안’이 빠졌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입주민 126명이 시행사와 지자체를 상대로 단체 소송을 제기해 화제가 됐다.
통상 전문 지식이 부족한 입주민들이 시행사나 건설사, 지자체를 상대로 법적 싸움에서 이기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달 12일 부산지방법원이 아파트 입주민들의 침수 피해를 인정하고 승소 판결을 내려 의미 있다는 평가다. 그럼에도 위자료가 인당 10만원에 불과해 소송 과정에서 입주민들이 들인 금전적 비용과 시간, 심리적·정신적 에너지 소모 등을 고려하면 보상액이 너무 적은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힐스테이트 이진베이시티’는 부산 송도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옛 한진 매립지 부지에 최고 69층, 총 1368가구 규모 개발한 대규모 주상복합아파트다. 과거 분양 당시 부산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오션뷰 입지를 내세워 계약자를 모았다.
하지만 2022년 5월 입주한 뒤 불과 100일 정도가 지난 9월, 태풍 힌남노가 불어닥치면서 아파트 전체가 마비됐다. 당시 지하 6층까지 침수되면서 이 곳에 설치된 주차장·전기실·통신시설은 물론이고 엘리베이터 37대까지 멈춰섰다. 입주민들은 아파트에서 물이 빠지고 엘리베이터가 정상적으로 수리될 때까지 수 일 동안 계단을 오르내리는 불편을 겪었다. 하필 이 단지가 최고 69층 높이 초고층으로 계획돼 고령자나 임산부, 어린 자녀가 있는 가정은 피해가 더욱 컸다.
조사 결과 ‘힐스테이트 이진베이시티’ 침수 피해가 유독 컸던 이유가 드러나면서 입주민 분노가 쏟아졌다. 시행사 아이제이동수가 침수를 대비하는 시설을 설치하지 않았고, 이를 관리감독해야 하는 부산 서구청이 이 상태로 아파트 사용승인을 내주는 바람에 단지가 마비됐던 것.
1987년 매립지로 탄생한 이 아파트 부지는 과거 반복적으로 침수 피해를 겪는 지역으로 악명 높았다. 당초 지구단위계획상 관광·상업 지역이지만, 태풍·해일 피해를 방지해주는 ‘방재호안’을 설치하는 조건으로 주거지로 탈바꿈했다. 2015년 아파트 건설을 위한 지구단위계획 변경결정 과정에서 내려진 의결이다.
이후 사업승인과정에서도 환경영향평가 및 사전재해영향성검토 위원회 협의 당시에도 방재호안 설치 및 월파 대비 시설 설치 등 조치 사항이 수 차례 기재됐다고 전해진다. 당시 시행사 아이제이동수가 단순 배수계획을 수립하겠다고 했지만, 부산시가 전면해역에 설치하는 방재호안을 반영하는 조건으로 변경안을 승인해주는 등이다.
방재호안 설치 사업은 총 두 단계에 걸쳐 추진하기로 했다. 먼저 단지 인근에서 진행하는 1단계인 서방파제~송도해수피아 총 500m 길이 시설은 아파트가 입주할 쯤 준공했다. 하지만 정작 ‘힐스테이트 이진베이시티’가 있는 2단계 시설(송도해수피아~거북섬 총 500m)은 아파트가 준공한 2022년 5월까지도 첫 삽을 뜨지 못했다.
결국 입주 4개월여 만에 태풍이 발생하면서 월파로 지하주차장과 엘리베이터가 침수됐고, 단전·단수 피해까지 벌어져 입주민들이 재산 손실을 입게 됐다. 이에 입주민 1326명이 시행사와 서구청이 자연재해에 취약한 아파트를 공급했다는 의견을 모아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던 것이다. 이 단지가 총 1368가구인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모든 입주민들이 소송에 동참한 셈이다.
소송 당시 아이제이동수 측은 언론에 “사업시행자로서 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면서 “입주민들이 피해손실에 대한 감정도 하지 않았고, 결국은 정신적인 피해를 보상하라는 정도라 큰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밝혀 입주민 분노를 키웠다. 더불어 부산 서구청은 “입주 시점에 사용 승인을 하지 않으면 재산권 피해가 우려됐다”며 허가를 내준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이번 판결에서 재판부가 입주민들 손을 들어주면서 갈등이 일단락될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시행사 아이제이동수가 ‘힐스테이트 이진베이시티’ 입주일 전 방재호안이 미설치될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월파 예측 시뮬레이션 수치를 축소하고, 제대로 된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다며 과실을 인정했다. 또 부산 서구청에 역시 태풍 피해가 예상됨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는데도 시행사에 방재시설 설치에 대한 관리 대책 수립을 지시하지 않았고, 사용승인까지 내줬으므로 행정적 과실이 있다고 봤다.
업계에선 시행사와 관할구청 잘못을 인정한 이번 판결이 의미있다고 평가한다. 다만 입주민 사이에선 과거 입었던 피해와, 앞으로 자연재해가 또 닥치는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감안하면 인당 10만원이라는 보상금이 너무 적은 것 아니냐는 등 반응을 보이고 있다. /leejin0506@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