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개인정보를 재추위더러 걷어오라는 서울시의 황당한 조례 | 유상근 올림픽선수기자촌아파트 재건축정비사업 조합설립추진위원회 위원장
[땅집고] 최근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태는 한국 사회에 다시 한 번 ‘내 개인정보는 과연 안전한가’라는 분명한 질문을 던졌다. 대기업조차도 개인정보 관리에 실패하는 시대에, 시민들은 불안해하고 분노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서울시의 도시정비 행정은 이 질문에 대해 정반대로 “괜찮다. 주민등록등본을 조합에 내라”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서울시의 조례 체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재건축·재개발 조합설립 단계에서 개인의 사생활이 고스란히 담긴 주민등록등본을 조합설립추진위원회가 직접 걷어오도록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그 책임의 중심에는 서울시가 아니라, 조례를 고치지 않고 방치해 온 서울시의회가 있다.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시행규칙’ 제8조는 조합설립인가 신청 시 조합원 명부를 제출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이에 근거해 서울시는 ‘서울특별시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 조례 시행규칙’ 제8조 및 별지 제11호 서식을 통해 조합원 명부에 주민등록등본을 첨부하도록 사실상 요구하고 있다. 실무에서는 이 서식이 곧 ‘의무’처럼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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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실무에서 “서식에 있으니 제출하라”는 말로 모든 논의가 끝난다. 그러나 이 요구는 이미 사법부로부터 사실상 부정당했다. 서울고등법원은 조합원 명부에 주민등록등본을 첨부하도록 한 취지가 동일 세대 여부 확인 등 자격 판단을 위한 것일 뿐, 조합설립 동의율이나 동의자 수 산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명확히 판시했다. 더 나아가, 설령 주민등록등본이 일부 첨부되지 않았더라도 행정청은 행정정보 공동이용시스템을 통해 이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으므로, 그 첨부 여부가 조합설립인가 처분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역시 이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즉, 법원은 이미 “등본을 내지 않아도 인가에는 문제가 없다”고 선언한 셈이다. 그럼에도 서울시의회는 수년이 지나도록 조례와 시행규칙을 단 한 글자도 고치지 않았다. 더 심각한 것은 이 낡은 발상이 도시정비법 체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울특별시 빈집 및 소규모주택 정비에 관한 조례 시행규칙’에서도 동일하게 주민등록등본 제출을 전제로 한 서식 구조가 유지되고 있고, 서울시는 2024년까지도 질의회신을 통해 주민등록등본 요구 관행을 사실상 인정해 왔다.
이는 단순한 행정 착오가 아니다. 의도적인 방치다. 주민등록등본은 단순한 행정서류가 아니다. 개인의 주소, 세대 구성, 가족관계의 단면이 담긴 매우 민감한 개인정보다. 쿠팡 같은 대기업에서도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발생하는 시대에, 왜 시민들은 재건축정비사업 조합설립추진위원회라는 민간 조직을 믿고 등본을 제출해야 하는가. 추진위와 조합은 공공기관이 아니다. 전문적인 개인정보 관리 시스템도, 책임 있는 감독 체계도 없다.
그럼에도 서울시 조례는 시민에게 “서식에 있는건 내셔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행정인가. 행정정보 공동이용 제도는 장식용으로 존재하는가. 행정청이 버튼 몇 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정보를, 왜 시민에게 종이로 떼 오게 하고, 그것을 또 다른 민간 조직의 캐비닛과 서버에 쌓아 두게 하는가. 이는 개인정보 보호법이 천명한 최소 수집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발상이자, 디지털 행정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사고방식이다.
‘미친 발상’이라는 표현이 과격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쿠팡 사태로 온 사회가 개인정보 유출의 위험성을 체감한 지금, 시민의 사생활이 담긴 주민등록등본을 대규모로 걷어오게 만드는 제도를 그대로 두는 것이야말로 정상적인 감각에서 벗어난 정책이다.
책임은 분명하다. 실무에서 등본을 요구하는 창구는 구청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근거를 만들어 두고, 판례와 제도 변화, 사회적 인식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치해 온 주체는 서울시의회다. 이는 행정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의 기본권 보호를 외면한 입법부작위다.
서울시의회는 이제 선택해야 한다. 시민의 개인정보를 보호하는 쪽인가, 아니면 “예전부터 그랬다”는 이유로 위험한 관행을 고수하는 쪽인가.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태를 보며 분노했다면, 이제 시선을 돌려야 한다. 서울시 조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시민에게 주민등록등본을 내놓으라고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그 조례를 고치지 않는 한, 서울시의회 역시 이 위험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글= 유상근 올림픽선수기자촌아파트 재건축정비사업 조합설립추진위원회 위원장, 정리=박기람 땅집고 기자 pkra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