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부동산 대책 설계하는 ‘관치금융 공화국’
금융위, 버블파이터 될까 서민 괴롭히는 선무당될까
[땅집고] “능력만큼만 빌리고, 대출은 나누어 갚도록 한다”
이재명 정부의 6.27 가계부채 관리 강화 대책의 슬로건 같은 이 문구는 사실 지난 문재인 정부 시절 금융당국 수장이었던 고승범 금융위원장이 내세운 원칙이다. 2021년 당시 금융위가 가계부채 관리방안을 본격화하면서 고 위원장은 “우리나라 가계부채 증가율은 세계에서 속도가 가장 빠르다”며 “상환 능력을 중심으로 한 대출 원칙을 기반으로 가계부채 증가와 금융불균형 누적을 진정시키려 한다”고 말했다. 달리 말하면 능력이 없는 무주택 서민에게는 주거 사다리를 끊겠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고 위원장은 ‘가계부채 저승사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금융당국이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장에 적극 개입하는 일은 이후 정부가 바뀌어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정부에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서민 전세대출을 규제하려는 시도를 했다가 3일 만에 철회했고, 최근 이재명 정부의 첫 부동산 대책을 설계한 권대영 금융위 사무처장은 “과도한 레버리지로 주택을 구입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겠다”고 발언하며 초강력 대출규제책을 내놨다.
■ 문 정부 ‘가계부채 저승사자’ 고승범, 윤 정부 ‘버블파이터’ 이복현…대출규제로 시장 개입
고승범 위원장은 강력한 가계부채 억제 정책의 상징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2021년 하반기 금융위원회는 투기·조정대상지역에 6억원을 초과하는 주택담보대출, 1억원을 초과하는 신용대출에 대해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을 적용했다. 차주의 연소득 대비 모든 대출 원리금 상환액이 40%를 넘지 않도록 제한했다. 기존에는 2024년까지 순차 도입할 예정이었던 일정을 2년 앞당겼다. 심지어는 전세대출에도 DSR을 적용하는 규제를 시도했지만, 청년층과 실수요자의 반발로 한시 예외 적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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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책 시행 이후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을 살펴보면 2021년 4분기 102.4%에서 2022년 3분기 104.4%로 오히려 최고점을 경신했다. 집값도 잡히지 않았다. 서울의 아파트값도 2021년 7월 이후 1년간 지속적으로 상승해 3.89% 올랐고, 지방도 4.65% 올라 전국이 1년간 5.82% 상승했다.
가계부채 총량과 집값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고, 금리와 자잿값이 동반 상승한 2022년 하반기 들어서 낮아졌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차주별 DSR제도가 본격화했다. 여기에 더해 ‘버블 파이터’를 자임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시중은행을 압박하는 방식으로 시장에 적극 개입했다. 이 원장은 지난해 8월 한 TV프로그램에 출연해 “지금까지는 시장 자율성 측면에서 은행들의 금리 정책에 관여를 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부동산 시장 상황을 감안해 은행에 대한 개입을 더 세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한다”고 발언하며 은행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였다.
급기야 작년 9월 시중은행에 가계부채 증가세를 압박하면서 은행들이 조건부 전세자금 대출 중단, 1주택자 주택담보대출 중단, 신용대출 제한 등 고강도 대출 규제에 나섰다.
하지만 전세대출을 급작스럽게 규제하면서 실수요자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서민 괴롭히는 선무당’이라는 비판과 함께 금융감독원장이 금융위원장, 국토부, 기획재정부 부총리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금융 부동산 정책을 좌우하는 월권을 저지른다는 지적도 나왔다. 그러자 3일 만에 입장을 바꾸어 “가계대출 급증세와 관련해 세밀하게 입장과 메시지를 내지 못한 부분과 이로 인해 국민, 은행 직원들에게 불편과 어려움을 드린 점에 대해 죄송하다”고 밝히며 은행 자율에 맡기도록 했다.
■권대영 금융위 사무처장 “악순환의 고리 끊어야”…더 강력한 대출규제
이재명 정부 역시 첫 부동산 대책인 ‘6.27 가계부채 관리 강화 방안’을 금융당국이 주도했다. 권대영 금융위원회 사무처장은 주택담보대출의 최대 한도를 6억원으로 규제하는 고강도 대출 규제를 설계한 인물로 알려진다.
그는 대책을 발표하면서 “그간 상환능력을 초과하는 과도한 빚을 레버리지로 삼아 주택을 구입하는 행태 등으로 주택시장 과열과 침체가 지속 반복돼 왔으나 이제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이 지난 7월4일 대전 타운홀 미팅에서 권 사무처장을 가리키며 “이번에 부동산 대출 제한 조치를 만들어낸 분, 잘하셨습니다”라고 공개적으로 칭찬을 했다. 이 대통령은 전날 기자회견에서 “이번 부동산 관련 대출 규제는 맛보기에 불과하다”며 “수요 억제책은 얼마든지 남아있다”고 밝혀 더 강력한 대출 규제가 나올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업계에선 고승범 위원장이 반발에 가로막혀 시행하지 못했던 전세대출에 총부채원리금상환 비율(DSR)을 적용하는 방안이 검토된 것으로 알려진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미 전세 정책대출인 버팀목 전세자금대출 한도가 2억원에서 1억5000만원으로 낮아져 무주택 청년·저소득층이 비싼 월세에 고통당하고 있는 현실”이라며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금융당국이 기준금리 등을 조정하면서 간접적으로 주택 시장 과열에 대응하는 경우는 있어도, 우리나라처럼 직접 대출 총량 규제를 위해 부동산 정책을 금융당국이 직접 설계하는 나라는 없다”고 했다. /rykimhp206@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