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집고] 현대차그룹이 그룹 사옥용 건물인 강남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건축을 두고 ‘국내 최고층’ 타이틀을 내려놓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동안 현대차그룹이 최고층 건물 건축을 포기할 것이란 이야기가 업계 안팎에서 공공연하게 나오긴 했지만 이렇게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힌 건 이번이 처음인데요.
만약 현대차그룹이 ‘105층’이라는 원안을 고수했다면 국내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인 ‘롯데타워’ 보다도 더 높은 최고층 건물이 됐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에 층수를 낮추면서 50층 내외 2개 동과 저층 4개 동을 합해 총 6개 동을 올리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건물 높이를 확 내린 대신 건물 수를 늘린 거죠.
현대차그룹의 100층 초고층 빌딩 포기로 국내 초고층 빌딩 시대도 막을 내리는 듯합니다. 어쩌면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숙원 사업인 잠실 롯데월드타워 준공이 기점인 된 것 같은데요. 1~2세대 재벌 기업 회장들이 자식들에게 기업을 물려주면서 보다 실용주의적인 경영으로 바뀌면서 ‘높이로 기업 위상을 뽐내는 시대’가 끝난 겁니다.
현대차그룹의 이번 결정을 접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현명한 선택”이라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초고층 딱 하나만 내려놨을 뿐인데 가져가는 실익이 훨씬 많을 것이란 거죠. GBC 초고층 건축 사업은 한때 현대차그룹의 최대 과제로 떠올랐을 만큼 핵심 사업입니다. 그럼에도 현대차그룹이 초고층 포기라는 선택을 내린 이유는 뭘까요.
현대차그룹이 저층 설계로 방향을 선회한 데에는 역시 그룹 수장인 정의선 회장의 ‘실리주의’가 크게 작용했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포기할 건 포기하고 취할 건 확실히 취한다는 겁니다.
현대차그룹 입장에서 초고층을 포기하고 얻는 건 뭘까요. 바로 돈과 시간입니다. GBC를 짓는 데 있어 발목을 잡았던 문제가 몇 가지 있는데 초고층을 내려놓으면서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됐습니다.
대표적으로 ‘군 작전 방해’ 문제가 있습니다. 105층 건물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건물 높이가 500m가 넘다 보니 공군 레이더 작동에 제한이 있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천억원에 달하는 신규 레이더 설치 및 관리 비용을 현대차그룹이 부담하라는 결과가 나왔는데요. 높이를 낮추면 이 문제가 사라집니다. 인근 봉은사 일조권을 침해한다는 문제도 있었는데 이 문제도 같이 해결되고요.
공사비도 많이 줄어들 전망입니다. 초고층을 지으면 건물 활용 공간이 많아지니까 이득이 더 크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50층이 넘어가는 초고층 건물의 경우에는 여러 규제 사항들이 적용돼 건축비와 관리비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들어갑니다. 같은 연면적 기준으로 공사비가 1.5배에서 2배는 더 들어가고요. 결국 높게 지어서 얻는 이득보다 건물 건축과 그 이후 관리에 투입되는 비용이 더 많을 수 있는 거죠.
당초 GBC 초고층 건축에 들어갈 거라고 예상했던 건축비는 약 3조7000억원 정도입니다. 최근 공사비가 급등한 점을 고려하면 그 이상이 책정될 수 있었고요. 이번 설계 변경으로 약 1조원가량의 사업비를 줄일 수 있을 거라는 게 부동산 업계의 관측입니다.
서울시에 내기로 했던 공공기여금 액수도 줄어들 여지가 있습니다. 현대차그룹이 GBC 설계 과정에서 토지 용도변경이나 용적률을 완화해주는 조건으로 서울시에 1조7400억원을 주기로 했었거든요. 그 돈으로 서울시가 삼성역 복합환승센터를 짓기로 했었고요. 하지만 초고층에 따른 높은 용적률을 적용받을 필요가 없어졌으니 이 부분에도 변화가 있을 거란 예상이 나옵니다.
서울시 측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의 GBC 설계 변경 제안서에 대해 검토를 시작한 단계라서 3월 말쯤은 되어야 설계나 기여금 등의 변동사항과 관련한 윤곽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돈이 얼마나 줄어들 지에 대해서는 이해가 됐고, 이젠 시간이 얼마나 줄어들지를 따져볼까요. 초고층 건축은 특수 설계가 적용되는 만큼 공사 기간도 상당히 오래 걸립니다. 하지만 이번에 50층 내외로 낮추게 되면서 공사 기간이 상당 부분 단축될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공사 기간은 줄더라도 서울시의 역할이 공사 기간의 키를 쥐는 변수가 될 여지도 있습니다. 새로운 설계안에 대해서 서울시로부터 인허가를 다시 받아야 하거든요.
원래 2026년 12월까지 공사를 마칠 계획이었는데 만약 설계 변경으로 인해 서울시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진행해야 한다면 수년의 시간이 더 소요될 수 있습니다. 지난 환경영향평가도 통과하는 데만 꼬박 1년 반이 걸렸거든요. 게다가 2028년 완공 예정인 삼성역 복합환승센터 공사하고도 일정을 맞춰야 하는 부분이 있어서 서울시와 협상을 원활하게 해 나가야 할니다.
결론적으로 현대차그룹의 이번 선택이 시사하는 건 결국 최고층 랜드마크로 얻을 상징성보다 비용 절감으로 발생하는 사업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는 걸 텐데요. 초고층 건축을 추진했지만, 사업비 증액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사업 현장에서는 이런 추세를 따라갈 수도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초고층 건축을 추진하는 사업장에서는 공사비 증액 문제로 공사가 중단된 곳도 있고 기존 초고층 설계를 접는 경우도 생기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인천 청라국제도시에 448m 타워와 복합시설을 짓는 ‘인천 청라시티타워’ 개발 사업이 있는데요. 해당 사업장의 경우 사업비 증액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사업이 사실상 멈춘 상태입니다.
용산국제업무지구에 짓는 초고층 빌딩도 지난 2007년부터 사업 추진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동안 지지부진했습니다. 이번에 다시 서울시에서 용산 초고층 개발을 추진한다고 하는데 앞서 자금 부족으로 인해 사업이 엎어졌던 만큼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재건축 재개발 등 정비사업을 추진하는 현장에서도 상황은 같습니다. 성수, 압구정, 여의도 등에서 초고층 건축을 추진하고는 있지만 공사비가 워낙 어마어마하다 보니 오히려 초고층 건축에 반대하거나 원안을 백지화하는 지역도 나오고 있습니다.
성수 1구역의 경우에는 서울시 계획에 따르면 70층 이상 지을 수 있도록 허가를 내줬음에도 조합원 과반이 50층 미만 건축에 찬성하면서 초고층 건축을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서울시가 높게 짓도록 해준다는데도 주민들 스스로 거절 의사를 내비친 거죠.
이 밖에도 강남 재건축 사업지인 서울 강남구 개포주공6,7단지와 서초구 반포주공1단지에서도 49층을 목표로 재건축 사업을 추진했지만, 원안대로 35층 설계로 가기로 했고요. 높게 짓고 싶은 마음이야 없겠냐 만은 평당 건축비가 1000만원을 넘을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만큼 초고층 건축에 대한 부담감이 어마어마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현대차그룹의 이번 선택은 국내 초고층 건축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폭등한 공사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업장에서도 현대차그룹의 행보를 쫓아가게 될지 주목됩니다. /배민주 땅집고 기자 mjba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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