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집고

천조국 미국도 속수무책…한국선 대사관숙소 건설 22년째 표류

뉴스 이지은 기자
입력 2023.09.04 07:46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 건립 22년째 표류, 상] 주택법, 문화재, 용산구청에 발목

[땅집고] 1968년부터 서울 광화문에 자리하고 있는 주한 미국 대사관 건물. /조선DB


[땅집고] 최근 미국 대사관이 서울시와 부영그룹 측에 대사관 직원 숙소를 조속히 지어달라고 촉구했다. 총 150가구 규모인 대사관 직원 숙소는 아파트 형태로, 현재 부영그룹이 보유한 용산구 아세아아파트 부지에 들어설 예정이다. 하지만 미국 대사관이 숙소 건립을 처음으로 계획한 시기가 2000년대 초반인데도, 20여년이 넘도록 건물이 첫 삽도 뜨지 못할 정도로 사업이 지지부진해 서울시와 부영그룹 측에 착공을 독촉하는 공문까지 보낸 것이다.

☞관련 기사: 부영이 9년째 비워둔 용산 황금땅에 미국이 새 아파트 공사 독촉한 까닭

[땅집고] 올해 8월 서울시가 부영주택 측에 아세아아파트 사업 착공을 서둘러달라고 요청한 미국 대사관의 의견을 공문으로 전달했다. /서울시


미국조차 한국의 주택·건축법, 시민단체, 자치단체의 벽을 넘지 못해 대사관 직원 숙소를 못 짓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업계에선 “천조국인 미국도 한국에선 건물 하나 지으려면 20년이 넘게 걸릴 정도로 인허가 받기가 쉽지 않다”는 말까지 나온다. 한국의 무엇이 미국 대사관의 직원 숙소 건립을 좌절시켰을까

①2000년대 초, 직원숙소 일반분양하라는 주택법에 발목 잡혀   

1968년부터 서울 광화문에 자리잡고 있는 미국 대사관은 1977년 무렵 청사 이전을 결정하면서 꾸준히 이사할 땅을 물색해왔다. 그러다 2001년 초, 덕수궁 서쪽에 자리잡은 대서관저 인근 경기여고 부지에 새 대사관 건물과 직원 숙소용 아파트를 신축하는 마스터플랜을 확정했다. 경기여고 부지는 1983년 10월 주한 미국 대사와 서울시장이 부지를 맞교환하면서, 을지로에 있던 미국 문화원 건물을 내준 대신 받았던 땅이다.

[땅집고]2000년대 초반 미국 대사관은 덕수궁 인근 부지에 새 대사관 건물과 직원 숙소를 지으려고 했다. /조선DB


처음으로 나온 계획은 새 대사관 건물은 지하 2층~지상 15층으로, 직원 숙소는 최고 8층 높이, 총 54가구 규모로 각각 짓는 내용이었다. 미국 대사관은 2002년 자국 출신 유명 건축가 마이클 그레이브스를 초청해 설계 방향을 발표하는 등 건물 신축 의지를 확실하게 피력하기도 했다. 완공 목표 시점은 2008년으로 설정했다.

하지만 국내 법 때문에 사업 초반부터 제동이 걸렸다. 당시 주택건설촉진법이 20가구 이상으로 짓는 공동주택의 경우 공개청약을 통해 일반분양하도록 규정한 데다, 주차장·놀이터 등 부대시설을 의무적으로 설치하게끔 되어있어서다. 미국 대사관 측은 직원 숙소는 일반 공동주택이 아닌 외교관 시설이기 때문에 예외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주택법에 막혔다.

②덕수궁 터라며 시민단체 반발

[땅집고] 2000년대 덕수궁 터에 미국 대사관 건물을 들어설 계획이 알려지자 시민단체가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직원 숙소를 짓기로 했던 경기여고 부지가 덕수궁 선원전 터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건물 신축이 더 어려워졌다. 당초 궁궐이었던 땅에 외세와 관련한 건물을 짓는 것은 유적 파괴나 다름 없다는 시민단체의 시위까지 벌어졌다. 결국 문화재위원회가 신축 사업 부지 2만6000㎡(7800여평)을 보존하는 결정을 내리면서, 미국 대사관은 새 둥지를 트는데 첫 번째 고배를 마셨다.


③2010년대 부지맞교환에 용산구청장 “녹지축 지켜야” 반발

용산구청이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 부지가 녹지축을 막는다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아세아 아파트 부지의 아파트를 일부 기부채납받아 직원숙소로 제공하기로 했다.

 

옛 덕수궁 터에 건물 신축이 불가능해지자, 미국 대사관은 정부와 합의해 대체 부지를 물색했다. 2005년 양측은 미국이 보유한 경기여고 터 2만6000㎡와, 용산공원 북쪽 용산미군기지에 우리나라 정부가 소유한 ‘캠프 코이너’ 땅 7만9000㎡를 교환하는 내용의 합의서를 체결했다. 정부가 각 부지 지리적 여건과 지가 등을 고려해 미국이 반환하는 부지의 3배에 달하는 용산구 땅을 제공한 것이다.

2011년에는 서울시와 미국 정부가 대사관을 이 캠프 코이너 부지로 이동하는 양해각서를 쓰면서 ‘미 대사관 용산시대’가 열리는 듯 했다. 서울시는 당초 녹지지역이던 캠프 코이너 용도지역을 제2종일반주거지역으로 변경해, 미 대사관이 용적률 200% 이하에 높이 55m 이하, 최고 12층 이하 건축물 지을 수 있도록 허용해줬다. 미국 대사관은 이 곳에 직원 600명을 수용하는 청사와 115가구 규모 직원 숙소, 부대사 관저, 각종 행정시설 및 생활 편의 시설을 지을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번엔 용산구가 미국 대사관의 신축 계획을 저지하고 나섰다. 용산구가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가 들어설 땅을 용산공원으로 편입해야만 추후 남산~한강 녹지축을 완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


당시 성장현 전 용산구청장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미국 대사관 측의 원안대로 신축이 이뤄질 경우 용산공원 북측 통로가 대사관 직원 숙소에 막히게 되는데, 그러면 주민들이 불편하고 국가공원으로서 의미가 반감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이에 2018년부터 서울시에 캠프 코이너 땅과 인근 아세아아파트 일부를 맞바꾸자고 공식 제안해왔다”고 언급했다.

부영 그룹이 개발할 아세아 아파트 부지. 아파트 건립에서 층수 제한 등의 규제를 완화받는 대신에 미국 대사관 숙소로 일부 아파트를 제공한다.



아세아아파트 부지는 미국용산기지 서남쪽으로 맞붙어있는 대지면적 4만6524㎡ 규모 땅이다. 부영그룹이 아파트를 개발할 목적으로 2014년 3260억원에 매입했다.

결국 용산구 측 주장대로 한미정부는 2021년 부동산을 교환하는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당초 직원 숙소가 들어설 예정이던 캠프 코이너 부지 3만236㎡와, 부영그룹이 개발하는 아세아부지 아파트 150가구를 기부채납받아 맞바꾸는 내용이다. 부영그룹은 아파트를 기부채납하는 대가로 땅 용적률을 높여 아파트 최고 층수를 20층에서 33층으로 상향하고, 총 969가구 규모 대단지를 지을 수 있게 됐다./이지은 땅집고 기자 leejin0506@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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