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집고] 전국적으로 전세사기 피해가 잇따르면서 정부와 정치권이 이번주 중 전세사기 피해 대책을 담은 특별법을 제정해 본회의에서 통과시키기로 합의했다. 전세사기 피해자에게 우선매수권을 부여하고 세금 감면, 장기 저리 융자 등을 지원하는 방안이 담길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전세사기 주택을 매입해 피해자가 원할 경우 최대 20년간 시세의 절반 수준으로 장기 임대하는 방안도 포함된다.
하지만, 전세사기 대책 관련 법안만으로는 근본적인 전세시장 불안 문제에 대처하기 어렵단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 중에서는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거나 논의 중인 실거주 의무 폐지 법안, 전세대출 제도 등 전세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조치들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실거주 의무 폐지하면 갭투자 늘어”…깡통주택 양산 우려
업계에서는 이달 여야가 국회에서 논의키로 한 실거주 의무 폐지에 대해 보다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현행법상 분양가 상한제 주택 입주자는 최대 5년까지 실거주 의무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미분양이 급증하고 주택 시장이 크게 침체하자 정부는 분양권 전매제한 규제 완화와 함께 실거주 의무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전매제한 완화 조치는 국회 통과가 필요 없는 시행령 개정 사안이다. 이에 정부는 주택법 시행령을 개정해 지난 7일부터 수도권에서 최대 10년으로 묶여 있던 분양권 전매 제한 기간을 최대 3년으로 줄였다. 비수도권의 경우 최장 4년에서 공공택지·규제지역은 1년, 광역시 및 도시지역은 6개월로 완화했다.
다만, 실거주 의무까지 풀려야 전매제한 완화 조치가 실효성을 갖기 때문에, 국회는 실거주 의무 폐지를 골자로 하는 관련 법 개정을 위한 논의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몇 주 전부터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전세사기 피해 의심 사례가 나타나고, 피해자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등 걷잡을 수 없이 사태가 커지면서 이 시점에서 실거주 의무를 폐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실거주 의무가 사라지면 입주 아파트에 전세를 끼고 잔금을 치르는 집주인이 더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송승현 도시와경제 대표는 “전세 제도가 갖는 근본적인 폐해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실거주 의무 폐지 법안을 통과하는 것은 시의적절하지 않다”며 “법안 통과 시 갭투자(gap·전세를 낀 주택구입) 집주인이 늘면서 아파트 시장도 깡통주택이 무분별하게 증가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실거주 의무를 유지해도 문제다. 이미 정부가 풀어놓은 전매제한 완화 조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매제한 완화 조치는 분양권 거래를 활성화 하기 위해서인데, 실거주 의무가 계속 남아 있으면 분양권 매수세가 꺾일 수 있기 때문이다. 주택 시장에 또다른 혼란이 가중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여야가 결론을 내기 쉽지 않을 전망이다.
■전세대출 ‘180조’ 급증…“대출제도 손질 불가피”
임대차 시장의 체질 개선을 위해선 단기간 빠르게 급증한 전세 대출 제도도 손질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지난해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자금 대출은 2012년 23조원 규모에 불과했으나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부터 가파르게 증가해 2021년 말에는 180조원까지 폭증했다. 전세자금대출을 받은 가구 비중도 2013년 5.6%에서 지난해 12.2%로 늘었다.
연구소는 전세자금대출이 갭투자에 활용되면서 집값을 밀어올렸다고 지적했다. 현행 전세대출은 대부분 보증기관(주택금융공사, 주택도시보증공사, 서울보증보험)의 보증을 통해 진행돼 한도는 높고(80~90%), 금리는 주택담보대출이나 신용대출보다 상대적으로 낮다. 지난 정부에서 서민 주거안정을 위한 정책 수단으로 전세대출 금리 인하와 지원 대상을 확대했기 때문이다.
강민석 KB경영연구소 부동산연구팀장은 “서민 주거안정을 위해 전세대출이 필요하지만, 고가 전세주택까지 지원할 필요는 없었다”며 “주거 취약 계층에게 혜택을 주고 중위소득은 시장논리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강 팀장은 “전세자금대출도 대출자의 상환능력에 따라 대출한도를 제한하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에 포함해야 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세입자가 신축 빌라 전세 시세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구조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빌라왕’ 사태의 경우 건물의 감정가를 부풀려 제공한 것이 문제가 됐기 때문이다. 지난 19일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공급을 담당하는 한국주택금융공사는 오는 5월부터 고객이 제출한 감정평가서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송인호 KDI 경제정보센터 소장은 “공인중개사와 감정평가사가 담합해 작정하고 전세금 감정가를 조작하면 누구도 사기를 피해갈 수 없다”며 “적어도 전세대출보증보험을 내주는 공공기관에서라도 건물 가격이 정확하게 반영됐는지 재차 확인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리영 땅집고 기자 rykimhp206@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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