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집고] “작년 9월 신도시 새 아파트 잔금을 치를 때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투자)'했는데도 자금이 부족해서 아내와 함께 퇴직연금을 중도인출했어요. 20년 뒤 퇴직금보다 내 집이 있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일을 계속 하면 퇴직금은 또 생기잖아요.”
지난해 퇴직연금을 중도인출한 5명 중 3명은 집을 사는 데 연금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집값이 단기간에 급등하면서 퇴직 후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는 퇴직연금마저 주택 마련에 쓰인 것이다. 중도인출이 안되자 바로 해지를 택한 사례도 있다. 전문가들은 ‘지금이 가장 쌀 때’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많은 이들이 주택 매수에 나선데다 낮은 시중금리로 인해 부동산으로 자금이 쏠린 것이라고 평가한다.
■ 10명 중 8명, 주택 구매·전세 위해 퇴직연금 깼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1년 퇴직연금 통계'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퇴직연금 중도인출 인원은 6만9000명에서 5만5000명으로, 전년 대비 20.9% 감소했다. 인출금액은 2조6000억원에서 1조9000억원으로 25.9% 줄었다.
중도인출 사유 중에서는 '주택 구입'이 54.4%(2만9765명)로 가장 많았다. 퇴직연금을 중도인출한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은 주택 구매에 연금을 사용한 것이다. 금액 역시 1조2122억원(46.3%)에서 1조2659억원(65.2%)으로 늘었다. 전체 인출 금액은 줄었지만, 주택마련을 위한 인출 금액은 증가한 것이다.
전세 보증금 마련 등 주거 임차 목적으로 연금을 중도 인출한 사람도 1만4870명(27.2%)이었다. 이는 퇴직연금 중도인출자 10명 중 8명(81.6%)이 매매나 전세 등 '집' 때문에 연금을 인출했다는 의미다. 기타 연금 해지 사유로는 회생 절차(12.9%), 장기 요양(4.2%) 등이 뒤를 이었다.
퇴직연금 중도 인출자는 30대(45.1%)와 40대(31.0%)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20대의 경우 주택구입보다 주거임차로 인한 중도 인출 비율이 소폭 높았다.
■ ‘노후보장’ 포기 왜?…‘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부담감 때문
퇴직연금은 기업이나 개인이 퇴직급여 일부를 금융기관에 적립‧운용하고 근로자 퇴직 시 연금(또는 일시금)으로 지급하는 제도다. 현재 퇴직연금은 사업장에서 설정하는 확정급여형 퇴직연금(DB), 확정기여형 퇴직연금(DC), IRP특례형 및 근로자가 설정하는 개인형 퇴직연금(IRP)으로 나뉜다. 국내 도입 대상 사업장 1530만개 기업 중 41만5000개 기업이 퇴직연금제도를 두고 있다.
퇴직연금은 근로자의 퇴직 이후 생활을 어느정도 보장한다는 점에서 중도인출 조건이 까다롭다. 가령 무주택자인 가입자가 본인 명의의 주택을 구입하거나, 역시 주거 목적의 전세금·임차보증금을 부담하는 경우, 가입자 본인·배우자 또는 부양가족이 6개월 이상 요양이 필요하는 등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정부는 직장인이 퇴직연금을 최대한 유지할 수 있도록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시행령을 통해 중도 인출 사유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중도인출이 안되자 바로 해지한 경우도 있다. 지난해 말 이직하면서 퇴직금 1500만원을 받은 B씨는 이 돈을 모두 찾아 대출금을 갚는 데 썼다. 그는 내집마련을 하면서 신용대출과 마이너스통장, 퇴직연금 등을 통해 자금을 총동원한 바 있다.
A, B씨를 비롯해 노후 보장보다 당장의 내집마련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이들이 늘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심리적 부담감이 크게 작용한 영향이라고 입을 모았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은 “더 이상 늦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주택 매수에 나선 이들이 많았던 영향”이라고 전했다. 안명숙 루센트블록 부동산총괄 이사 역시 “집값이 급히 오르면서 사회적으로 ‘내 집 마련을 못할 수 있다’는 공포감이 조성된 게 가장 크다”고 설명했다. 이어 “퇴직연금의 경우 안정적으로 운용이 되는 편”이라며 “특히 지난해가 부동산 수익률이 높았던 시기였던 만큼, 부동산으로 자금이 몰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서경 땅집고 기자 westseou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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