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인한 경기 침체 영향으로 전국 상가 공실률이 치솟았다. 곳곳에서 문 닫는 점포가 속출하고, 대출로 인한 생활고를 겪는 점주들이 적지 않다. 땅집고는 ‘벼랑 끝 상권’ 시리즈를 통해 몰락하는 내수 경기의 현실과 자영업자들의 목소리를 담아 전한다.
[벼랑 끝 상권] 군산 ‘아메리카타운’의 몰락
[땅집고] “여기가 ‘군산의 이태원’이라고요? 참나, 그렇게 됐으면 원이 없겠네. 그런데 여기 술집들 꼬라지를 좀 봐요. 입구에 풀 자라있고 고지서 잔뜩 꽂혀있고, 이미 다 망해버렸는데….”
지난 4일 찾은 전북 군산시. 식당·카페·주점이 몰려있어 군산에서 핵심 상권으로 꼽히는 수송동 사거리에서 자동차를 타고 15분 정도 가니 ‘SEE YOU AGAIN, INTERNATIOANL CULTURE VILLE’(다시 만나요, 국제문화마을) 이라고 적힌 파란색 아치형 간판이 나타났다. 차에서 내려 간판 뒤로 이어진 아스팔트 도로를 쭉 걷다보니 곧 ‘아메리칸타운, 항상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라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현수막이 걸린 지점부터 ‘ㄱ’자 형태로 꺾여있는 골목을 따라 1층짜리 낡은 상가가 줄줄이 들어서있다. 김치찌개·비빔밥·만둣국 등 한식과 후라이드치킨·감자튀김 등 양식을 함께 파는 ‘빅보이 레스토랑’, 운동복과 각종 스포츠 용품을 판매하는 ‘리 스포츠 웨어’ 등 외국 느낌이 물씬 나는 점포가 여럿 있었지만 하나같이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포도·레몬·망고·키위 등 각종 과일 소주 메뉴가 돋보이는 ‘휠(Feel) 소주바’ 매장은 문이 아예 열린 채로 방치돼 있다.
식당·주점이 대부분인 골목 초입을 지나자 곧 ‘클럽’이 줄지어 나타났다. ‘엔조이 클럽’, ‘볼륨’, ‘파라다이스’, ‘T.O.P’, ‘LA클럽’ 등 30곳 정도 됐다. 당초 원색으로 제작됐을 매장 간판마다 빛이 바랜 데다가 먼지가 뽀얗게 앉아있다. 출입문 바닥에 풀이 무성히 자라있거나, 출입문 손잡이나 틈새로 밀린 고지서가 수북히 쌓여있는 매장이 전체의 70~80%에 달했다.
1970년대 조성된 이래로 군산시에서 ‘밤에 가장 화려한 상권’으로 꼽히던 산북동 일대 ‘아메리카타운’이 사실상 소멸 위기에 처했다. 점주들이 상권을 되살리기 위해 이 일대 명칭을 ‘국제문화마을’로 바꾸고 매장을 최신식으로 리모델링·인테리어하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코로나 불황을 이기지 못하고 대부분 상가가 폐점한 상태다.
이날 땅집고 취재진이 아메리카타운에서 만난 한 클럽 점주는 담배를 피우며 “식당은 이미 다 망했고, 클럽도 대부분이 운영을 중단했다”며 “한창 땐 오후 6시 정도에 개점했는데 (최근에는) 어차피 손님이 없으니 8~9시에나 장사를 시작한다. 그래도 찾는 사람이 없어 우리도 문을 닫아야 하나 고민 중”이라고 했다.
■60년대 중반 외화수입 10% 벌어들이던 ‘아메리카타운’
전북 군산시 산북동 일대에 있는 ‘아메리카타운’. 지역 주민들은 줄여서 ‘에이(A) 타운’ 혹은 ‘타운’으로 불렀다. 현재는 식당을 비롯해 술집 등 유흥업소로 이뤄진 상권이지만, 당초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시기인 1969년 주한미군 전용 위락시설을 표방하면서 조성한 민간인 기지촌이다.
아메리카타운 건설을 지휘한 사람은 당시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이자 5·16 군사정변의 주역으로 통하는 백태하 대령이라는 증언이 있다. 백 대령의 조카가 ‘주식회사 옥구아메리카타운’을 설립한 뒤 군산시 산북동(당시 옥구읍) 일대 토지 1만여평을 매입하고, 식당·미용실·환전소·클럽 등 상가 55여곳을 비롯해 매매춘을 위한 방 500여개를 조성했다고 알려졌다. 미군으로부터 벌어들이는 달러가 쏠쏠해 대낮에도 영업할 정도였다. 1964년 외화 수입이 1억달러 수준이었는데, 아메리카타운에서만 벌어들이는 돈이 전체의 10% 수준인 960만달러에 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권이 바뀐 후 아메리카타운은 국가가 개입하는 기지촌에서 일반 유흥상권으로 체질을 개선했다. 성매매촌이라는 인식을 벗기 위해 점주들이 매장을 깔끔하게 리모델링·인테리어하고, 2010년에는 이 일대 명칭을 ‘국제문화마을’로 변경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당초 미군을 주고객으로 했던 터라 영어로 된 간판을 달고 있는 식당, 옷가게, 클럽 등이 있는 점을 들어 아메리카타운을 ‘군산의 이태원’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한국외국인관광시설협회 군산지부 관계자는 “마을 초입에 있는 ‘국제문화마을’ 간판도 아메리카타운 점주들이 자체적으로 세운 것인데, 이때 군산시가 예산을 조금 보태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여파로 상권 전멸…아파트 개발계획에 토지 수용 압박도
하지만 현재 아메리카타운 점포들은 거의 전멸 상태다. 땅집고 취재진이 집계한 결과 이 일대 점포는 ▲식당 5곳 ▲옷가게 2곳 ▲주점 3곳 ▲슈퍼 1곳 ▲클럽 27곳으로 구성됐다. 이 중 식당·주점·옷가게는 전부 폐업한 상태며, 클럽 5곳 정도만 겨우 운영을 이어가고 있다.
상권이 이렇게까지 침체된 이유가 뭘까. 점주들은 지난 3년여 동안 이어져 온 코로나19 영향이 가장 컸다고 입을 모은다. 술집·유흥업소가 대부분인데 코로나로 영업제한을 받으니 매출에 큰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문을 닫은 클럽 ‘T.O.P.’ 출입문 손잡이에는 밀린 고지서가 꽉 들어차있고, ‘막튬’ 건물 옆에는 각종 쓰레기와 인테리어 폐기물이 잔뜩 쌓여있다.
아메리카타운 내 R클럽 점주는 “그동안 코로나 영업제한 때문에 가게 운영 자체를 못했다. 셔틀버스를 타고 이 일대 술집을 자주 찾던 미군부대 군인들마저도 코로나로 외출 금지를 당하는 바람에 손님이 없다시피 했다”며 “이제 영업제한이 풀려 2년 반 만에 다시 가게 문을 열었는데, 장사가 너무 안되니 그냥 접을까 생각 중”이라고 했다.
점주들 사이에선 당초 아메리카타운을 조성했던 주식회사옥구아메리카타운에 대한 불만도 쏟아져나온다. 2015년쯤 주식회사옥구아메리카타운은 그때까지만 해도 건물 소유권만 갖고 있던 점주들에게 건물이 들어선 땅을 팔기 시작했고, 비싼 월세가 부담이었던 점주들은 앞다퉈 토지를 샀다.
문제는 ㈜옥구아메리카타운이 최근 2~3년 동안 광주광역시에 본사를 둔 건설회사인 ‘지인주택’에 아메리카타운 내 굵직한 토지 대부분을 매도하면서 불거졌다. 지인주택은 이 일대를 아파트촌으로 개발할 계획을 세우고, 점주들이 보유한 짜투리땅을 매수하기 위한 금액 협상을 시도하며 토지수용을 압박하고 있는 것. 하지만 점주들이 지인주택이 제시한 금액이 ‘헐값’이라고 생각해 협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산북동 일대 공인중개사들에 따르면 주식회사옥구아메리카타운이 갖고 있던 전체 1만평 토지 중 6000평 이상을 지인주택이 넘겨받은 상태다. 실제로 대법원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지인주택은 2021년 5월 아메리카타운 내 토지를 여럿 매수했다. ▲산북동 505-160번지 1351㎡ 12억7800만원 ▲505-161번지 586㎡ 5억5500만원 ▲산북동 505-169번지 511㎡ 3억1700만원 등이다.
한국외국인관광시설협회 군산지부 관계자는 “그동안 점주들은 주식회사옥구아메리카타운에 임대료를 내고 장사해왔다.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 150만~200만원으로 군산에서는 비싼 수준이었다. 그러니 이들이 2015년쯤 점주들에게 땅을 살 기회를 준다고 했을 때 점주들마다 반기면서 매수한 것”이라며 “땅을 넘겼으면 점주들이 장사를 하게 둬야하는데, 개발계획을 가진 건설사에게 대부분 땅을 팔아버리니 상권이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상권 전문가들은 앞으로 아메리카타운이 ‘유령 상권’ 신세를 면치 못할 가능성이 커보인다고 했다. 인근에 번듯한 아파트 한 채 없는 낙후지역이라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힘든 입지인데, 코로나 이후 대부분 점포가 문을 닫은 데다 아파트 개발 계획까지 가시화하고 있어 상권이 다시 살아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설명이다. 땅집고 자문단은 “이미 상권이 초토화된 상황이라 영세 자영업자들이 개인적으로 노력한다고 매출이 뛰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현재로서는 점주들이 다른 상권으로 매장을 옮기거나, 아파트 개발회사와 잘 협상해 최대한 높은 금액에 토지를 넘기는 것이 최선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군산=이지은 땅집고 기자 leejin0506@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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