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집고] 지난 23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전철 수인분당선 구룡역을 빠져나오자 남서쪽으로 높은 철제 가림막이 도로를 따라 길게 펼쳐졌다. 가림막 안쪽으로 타워크레인 수십대가 서 있는 ‘디에이치 퍼스티어 아이파크’ 아파트 공사 현장이 보였다. 그런데 현장 중앙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낡은 아파트가 눈에 띄었다. 재건축 후 아파트가 들어선 뒤에도 이른바 ‘정비사업 역사흔적 남기기’ 사업에 따라 옛 원형을 그대로 보존할 예정인 개포주공1단지 15동이다.
개포주공1단지 재건축조합이 최근 이 같은 ‘정비사업 역사흔적 남기기’ 사업에 대한 계획 변경을 추진하면서 서울시와 마찰을 겪고 있다. 조합 측은 원형 보존 대상인 15동을 허물고 공원을 만들려고 하는데, 서울시는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고 있는 것.
개포주공1단지 재건축 조합은 최근 문화부지로 예정된 15동 터에 지하층 또는 최소한의 흔적만 남긴 채 공원을 조성하는 내용으로 ‘정비사업 역사흔적 남기기’ 사업을 새로 설계하기 위한 협력업체 선정 입찰공고를 냈다. 이달 초 첫번째 협력업체 선정이 유찰된 이후 두번째다. 지난 23일 현장설명회에 이어 12월1일까지 입찰을 받는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한 달 전 입찰에 단 한 곳도 참여하지 않았던 만큼 이번에도 유찰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이번 설계가 난이도에 비해 이윤이 크지 않은 탓이다. 낙찰받은 업체 입장에서는 서울시와 조합 간 이견을 조율하면서 인허가를 받아야 하는 것도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서울시는 조합측의 사업 변경 시도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당초 계획대로 15동 건물을 리모델링해 청소년 문화시설 겸 옛날 아파트 시설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조합 관계자는 “서울시와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주민이 자주 찾을 수 있는 공원으로 조성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서울시가 재건축 단지에 ‘한 동 남기기’를 강요하면서, 비슷한 문제가 서울 곳곳에서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개포주공4단지, 반포주공1단지, 잠실주공5단지 등도 일부 아파트 동을 보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공공택지지구로 선정된 송파구 가락동 옛 성동구치소 일대는 1977년 지은 구치소 건물을 일부 보존하는 계획이 세워져 있다. 개포동 주민 B씨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기껏해야 30년 정도 된 건물에 역사성이 있다면서 보존 결정을 내렸다”며 “이런 흔적 남기기는 결국 ‘박원순 흔적’을 남기는 것에 불과하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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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는 박 전 시장 사후 사업이 흐지부지된 상황에서도 서울시가 우유부단하게 결정을 미루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지적한다. 전직 건설업체 임원 A씨는 “(개포동 등) 당시에 공급한 주공아파트는 폭증하는 도시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대규모로 양산한 아파트로 건물 자체의 내구성도 낮을 뿐 아니라 건축학적, 역사적 가치도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며 “서울시와 오세훈 시장이 눈치 보지 말고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했다.
‘흔적남기기’ 사업이 지연되면 전체 아파트 준공 일정도 늦어질 수 있다. 흔적 남기기 사업은 기부채납의 일환인데, 기부채납을 완료해야 지자체가 준공을 승인하기 때문이다. 흔적남기기 사업이 늦어지면, 아파트를 다 짓고도 입주를 못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서울시는 각 조합에서 대안이 나오면 도시계획위원회를 통해 결정할 사항이라고 발을 빼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흔적 남기기는 외부 전문가까지 포함된 도시계획위원회에 최종 결정권한이 있는 만큼 조합에서 설계가 정해지면 검토해 상정할 계획”이라고 했다. /장귀용 땅집고 기자 jim332@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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