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집고

곳간 빵빵한 중견 건설사들, 대기업 부동산 쓸어담나

뉴스 박기홍 기자
입력 2020.04.25 04:58

[땅집고] 최근 대기업 중심으로 위기를 버텨낼 실탄, 즉 현금 확보에 비상이 걸리면서 그동안 아끼던 알짜 부동산이 시장에 쏟아져 나올 조짐이다. 최근 2~3년간 이어진 경기 침체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까지 겹쳐 경기 불황 우려와 자금난에 대한 압박감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땅집고] 코로나19 사태로 경영 환경이 악화되자 기업들이 부동산을 처분해 현금을 확보하고 있다. /조선DB


■ 한진그룹, 송현동 부지·파라다이스호텔 판다

22일 업계에 따르면, 한진·이마트·현대제철·아모레퍼시픽 등 대기업들이 기존 보유 부동산 매각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코로나 사태의 가장 큰 피해 업종 중 하나인 항공업을 주력으로 하는 한진그룹은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토지 3만6642㎡·건물 605㎡)를 매각한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과 광화문 옆에 위치한 노른자위 땅이다. 2008년 대한항공이 삼성생명으로부터 2900억원을 주고 매입했다. 이후 한진은 7성급 한옥호텔 신축을 추진해왔지만 각종 개발제한 규제에 묶여 수년째 방치되다가 결국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이번에 시장에 나왔다.

송현동 부지는 지난해 공시지가 기준으로 약 3100억원이지만, 업계에서는 매각가격이 최소 5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호텔을 짓지는 못했지만, 현재 시세 정도로 팔 수 있다면 제법 괜찮은 투자였던 셈이다. 한진은 제주도 서귀포시 파라다이스호텔과 해양레저시설 ‘왕산마리나’ 운영사 왕산레저개발 지분 100%도 처분한다.

[땅집고]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 한진그룹은 한옥호텔을 지을 예정이었지만, 경영난으로 땅을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조선DB


■ “실탄 확보하자” 산업 全분야 부동산 처분 줄이어

유통업계도 부동산 매각이 본격화할 전망이다. 이마트는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 부지(3만9050㎡)를 태영건설-메리츠종금 컨소시엄에 매각해 8000억원의 현금을 손에 쥐었다. 이 땅은 2014년 서울 주택도시공사로부터 2340억원을 주고 매입했다. 복합쇼핑몰 스타필드를 지을 예정이었지만, 오프라인 매장의 실적 부진 등 유통업계 상황이 급변하면서 개발 사업을 접고 매각을 통한 현금 확보로 방향을 선회했다. 이번 매각으로 이마트는 5700억원의 차익을 얻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올해 안으로 대형마트와 백화점 등 200개의 점포를 정리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CJ그룹도 코로나19로 외식 사업의 피해가 커지자 CJ푸드빌 등 자회사의 부동산 매각을 추진 중이다.

[땅집고] 서울 서초구 잠원동 현대제철 사옥.


현대제철은 서울 강남 요지의 빌딩을 내놓는다. 서울 영업소가 있는 서초구 잠원동 사옥을 매각하기로 결정한 것. 지하철 3호선 신사역과 7호선 논현역 사이 강남대로변에 있는 8층짜리 건물이다. 현대제철 관계자는 “이번 잠원동 사옥 매각으로 유동성을 확보하고, 통합 영업본부를 구축해 영업조직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 현금 많은 중견 건설사들 매수자로 떠올라

한국경제연구원이 올 들어 지난 21일까지 상장사의 유형자산 처분·양도 공시를 집계한 결과, 코스피와 코스닥을 합쳐 총 30건에 달했다. 토지나 부동산 등 유형자산을 팔아 현금 확보에 나서는 기업이 지난해 같은 기간(13건)과 비교해 3배 이상 늘었다. 처분·양도 금액도 1조5841억원으로 지난해 6226억원보다 2.5배 늘었다.

업계에서는 지난해 미·중 무역분쟁에 이어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치면서 기업들이 유동성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기업들은 2분기부터 코로나 영향권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고, 신용등급까지 줄줄이 강등돼 자금 조달이 더 어려워질 것에 선제적으로 대비하고 있다. 국내 신용평가사 3곳의 회사채 신용평가를 분석한 결과, 이달 들어 신용등급이 강등되거나 부정적 전망으로 바뀐 대기업은 한화솔루션·SK에너지·에쓰오일·호텔신라 등 총 16사에 달했다.

[땅집고] 부동산 등 유형자산 처분·양도 상장사. /한국경제연구원


대기업들이 보유하던 알짜 매물이 시장에 나왔지만, 매수자는 많지 않다. 신규 사업지 확보보다 투자 방어로 선회하는 기업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모레퍼시픽은 서울 논현동에 있는 성암빌딩을 이달 말까지 한양건설에 1600억원 규모로 매각하려고 했으나, 한양건설이 매입을 철회하면서 무산됐다. 한양건설 내부에서 가격에 부담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는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위기로 불확실성이 지속되고 있어 모든 기업들이 현금 유동성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에선 중견 주택건설사들이 매물로 나온 대기업 부동산의 매수자로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중견 주택업체들은 2014년 이후 주택경기 호황을 누리던 시절 아파트 분양으로 수천억원씩 현금을 확보하고 있다. 부영·호반·중흥·한양·반도·IS동서 등이 대표적이다. 이 기업들은 공사비만 받아 도급 공사만 하는 대기업 건설사와 달리 시행과 시공을 함께 하며 지난 5~6년간 자금을 축적했다. 이들은 대기업 부동산 뿐 아니라 기업 자체를 인수하는 것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현재 기업용 부동산 시장은 매수자 우위 시장이어서 ‘실탄’이 있어도 매수자들이 가격이 더 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가능성이 크다. 현금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진 중견 건설사 관계자는 “적당한 매물이 나오면 땅을 살 수도 있고, 아예 부동산 자산이 풍부한 기업을 사서 사업을 다각화하는 것도 고려 중”이라며 “이번 코로나 사태로 기업의 체질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박기홍 땅집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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