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집고] 서울 남대문시장 ‘장안액세서리’ 건물 1층에 30평대 점포를 소유하고 있는 박현국(76세)씨. 박씨가 소유하고 있는 점포에는 1.5~2평 정도 되는 작은 가게 20곳이 오밀조밀 입점해 있다. 점포 한 곳당 월 임대료가 30만원 안팎으로 한 달 수입은 700만원 정도 된다. 겉 보기에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남대문 점포 소유주다.
수출과 관련된 일을 하다 10년 전 은퇴하고 지금은 점포에서 나오는 임대료가 수입의 전부다. 사고를 당한 동생까지 포함해 70대 노인 3명이 여기에서 나오는 임대료로 먹고 산다. 소위 ‘생계형’ 점포 소유주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1월부터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까지 확산하면서 박씨가 소유한 점포 세입자들 심각한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가게를 찾는 손님이 80% 이상 줄었다. 점포에 세 들어 있는 임차인들이 견디기 힘든 상황이다.
박씨는 2월부터 석 달간 상인들의 임대료를 20% 깍아주기로 했다. 그는 “당장에 들어오는 수입은 줄지만, 10년 동안 인연을 맺은 상인들도 지금 심각한 상황이다”며 “지금까지 지내 온 정(情)도 있지만, 상인들이 살아야 나도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인들도 박씨의 제안에 고마워한다.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상인 최모씨는 “임대료가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힘든 시절에 이게 어디냐”며 “건물주가 먼저 임대료를 깎아준다는 마음이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연일 확진자가 급증하며 초유의 사태로 진행 중인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국 소상공인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자영업자들의 타격이 심각하다. 재래시장은 물론 마트와 백화점까지 텅텅 비는 상황이어서 건물주도 위기를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자영업자들은 실물 경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지난 2년간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의 직격탄도 맞았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 사태가 덮친 것이다.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건물주와 점포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위 ‘착한 임대인 운동’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임대인이나 임차인 모두 힘든 상황에서 임대인이 먼저 임대료를 깍아줘 상생(相生)하자는 취지의 운동이다. 정부가 주도하는 ‘관제(管制) 운동’의 냄새가 물씬 나지만, 그래도 임대인이나 임차인이 상생의 방식으로 동참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땅집고는 전국적으로 확산 중인 임대료 인하 운동을 주도한 남대문시장을 찾아 건물주와 상인들을 만나 봤다.
■ 남대문 시장 상인 40% 정도가 혜택 볼 듯, “생계형 점포 소유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남대문 대도종합시장 점포 네 곳에서 월 임대료 400만원을 받는 50대 이모씨는 최근 임대료 30%를 인하 하기로 했다. 이씨는 “장사가 안 되는 걸 뻔히 아는데 상인들에게 임대료를 다 내라고 말할 수가 없더라”며 “아내와 상의해 당분간은 그동안 저축해둔 돈을 꺼내 쓰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나보다 더 큰 양보를 하는 임대인들도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별것도 아닌데, 이름이 알려지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남대문시장 상인회는 ‘착한 임대료’ 운동으로 2월부터 4월까지 상인 2000여 명이 임대료 인하 혜택을 볼 것으로 추산한다. 남대문시장의 소형 점포 5493곳 중 40% 정도에 해당한다. 적지 않은 규모다. 점포 하나당 1.5평 내외 소형 집합상가가 모인 남대문시장에는 수십~수백개 점포를 가진 건물주도 있지만, 점포 5~20곳 내외를 가진 생계형 점포주가 더 많다. 남대문 시장 상인회는 “월 수입 150만~500만원 정도되는 점포 소유주들 가운데 임대료 인하 행렬에 동참한 사람만 100명이 넘는다”고 말했다.
■코로나 맞서는 ‘착한 임대인’ 운동, 전국으로 확산 이어져
과거 메르스(중동 호흡기 증후군)와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사태 때도 시장을 찾는 손님이 대폭 줄어들었지만, 임대료를 깎아 주는 건 코로나 사태가 처음이다. 남대문시장에서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김연호씨는 “건물주·점포 소유주라고 하더라도 임대료를 20% 인하하는 것은 아마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라며 “착한 임대료 열풍이 상인들에겐 힘이 되고 있어 더 확산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대구와 전북 전주·남대문 시장 등 민간에서 시작한 ‘착한 임대료 운동’은 공공 부문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정부는 1일부터 상반기에 임대료를 인하한 임대인에 대해 인하액 50% 만큼 소득세·법인세를 세액 공제해주는 방식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지난달 27일 기준으로 ‘착한 임대인’은 326명으로 집계됐다. 이들이 임대료를 내린 점포 수는 9372곳에 달한다. 심재립 남대문시장 장안액세서리 상가운영회장은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할 것이라는 우려 속에 살아가는 상인들이 조금이나마 힘을 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부의 자신감 넘치는 발표와 달리 이같은 지원책에 대한 법률적 뒷받침이 충분한가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착한 임대인' 정책은 조세특례제한법 개정법률안 입법 사안으로 법 개정이 필요하다. 정부는 이달 17일까지 열리는 임시국회 내 법안 처리를 하겠다는 목표지만, 아직 법안 발의조차 안 됐다. 재정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와 국회 논의 과정도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박기홍 땅집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