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오전 서울지하철 2·5호선 충정로역 9번 출구. 대로변 고층 빌딩들 사이로 빛바랜 녹색 페인트를 칠한 낡은 건물이 눈에 띄었다. 1930년대 지어 올해 80살을 훌쩍 넘긴 우리나라 최고령 아파트 ‘충정아파트’다. 지상 5층 60가구의 나홀로 아파트로 1층에는 편의점과 분식집, 공인중개사사무소, 카페 등 점포 6개가 영업 중이었다. 2~5층엔 주민들이 살고 있다. 외부인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무단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아파트 1층 입구 안쪽 벽에는 ‘사진 촬영 금지, 외부인 출입 금지’라는 경고문이 붙어있었다.
서울시 건축물대장에 따르면 충정아파트 준공일은 일제 시대인 1937년 8월 29일이다. 일부 문헌에는 1932년으로 기록돼 있다. 서울에서 둘째로 오래된 아파트인 중구 정동 ‘정동아파트’(1965년 1월 입주)보다 30년 이상 오래된 이른바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주인 여럿 바뀐 충정아파트…‘역대급 사기’에 휘말리기도
충정아파트는 일본 건축가인 도요타 다네요가 설계했다. 최초 건축 당시에는 지금처럼 5층이 아닌 4층이었다. 건축가 이름을 따서 ‘도요타(豊田)아파트’, 우리말로는 ‘풍전아파트’라고 불렀다. 1950년 6·25 전쟁 초에는 북한군이 점령해 양민을 학살하는 인민재판소로 썼다. 서울 수복 이후에는 UN군이 임시숙소로 활용했다. 이후 한국 정부에 귀속됐다.
충정아파트는 ‘역대급 사기’에 휘말리기도 했다. 1961년 김병조라는 인물이 6·25 전쟁으로 아들을 6명이나 떠나보냈다고 주장하자 정부는 그에게 건국공로훈장과 당시 5000여만원 상당이었던 충정아파트를 상으로 줬다. 김씨는 이 때 ‘반공의 아버지’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는 4층짜리 충정아파트를 5층으로 증축해 ‘코리아관광호텔’로 운영했다. 하지만 아들을 전쟁으로 잃었다는 김씨의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나면서 아파트는 국세청에 환수됐다.
이후에도 계속 호텔로 사용되던 충정아파트는 1975년 건물을 저당잡고 있던 서울은행에 넘어갔다. 서울은행은 호텔에서 아파트로 용도를 다시 바꾸고 리모델링한 뒤 일반 분양했다. 분양 당시 명칭은 ‘유림아파트’였는데 이후 지역명을 딴 ‘충정아파트’로 변경했다.
■세모꼴 중정(中庭), 층별 공동 화장실…옛 건축 문화 담겨
충정아파트는 대지면적 910.7㎡, 연면적 3550㎡ 정도다. 원래는 아파트 단지 규모가 더 컸다. 1979년 충정로를 8차로로 확장하면서 도로와 붙어있던 19가구의 면적이 일부 잘려나갔다. 제일 작은 주택형이 49㎡(15평)였는데 이 과정에서 26㎡(7.5평)으로 절반이 됐다. 현재 주택형은 26~99㎡다. 원룸에서 쓰리룸까지 있다.
아파트 내부 구조도 특이하다. 대지 모양 탓에 삼각형 모양의 중정(中庭·집 안의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마당)이 있다. 각 가구가 이 중정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다. 과거 호텔로 사용할 때 이 중정에 굴뚝을 설치해 우리나라 최초로 중앙난방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도시가스 개별난방하고 있다. 층마다 공동화장실도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 4월 충정아파트 86.61㎡는 3억2980만원(1층)에 거래됐다. 2년 전보다 1180만원 올랐다. 3.3㎡(1평)당 1256만원이다. 서대문구(1627만원)나 충정로3가(1864만원)의 평당 아파트 시세와 비교하면 저렴하다.
■한때 재건축 추진…문화시설로 영구 보존키로
올해 입주 40년을 넘긴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송파구 잠실동 잠실주공5단지 등은 재건축을 추진하고 있다. 이 단지들보다 훨씬 오래된 충정아파트는 왜 재건축을 안한 걸까.
충정아파트는 1979년 9월 2일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 당시 도시환경정비사업구역으로 최초 지정된 후 2008년에는 마포구 5구역 2지구로 변경 고시됐다.
하지만 주민간 이해관계가 극심하게 엇갈려 사업 진행이 안됐다. 충정로3가 A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는 “충정아파트 주변에 있는 무허가 주택, 빌라 주인들과 지분을 어떻게 나눌 지에 대한 갈등이 심했다”며 “지난 20여년 동안 추진위원회 설립·해체만 수 차례 반복했다”고 말했다.
지난 4월 서울시는 충정아파트를 문화시설로 변경해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마포로 도시정비형 재개발 정비계획 변경안’을 발표했다. 충정아파트를 기부채납 받는 대신 마포로 5-2지구 용적률을 기존 526.5%에서 590%로 올리고, 지상 28층까지 건물을 올릴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제안이다.
A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는 “서울시가 재건축·재개발 구역에 용적률·층수 혜택을 주는 것은 드문 일이긴 하지만 주민들 사이에는 서울시가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어 사업이 제대로 진행될 지는 미지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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