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라지만 개발이 제대로 안 돼서 경기도 신도시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는 동네들, ‘말만 서울’인 곳들이 아직 몇 군데 있잖아요. 녹번동도 그 중 하나였어요. 그런데 최근 2년 동안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줄줄이 들어서면서 녹번동이 신흥 주거지로 확 떠올랐죠.”(녹번동 A공인중개사사무소 관계자)
지난달 22일 찾은 서울 은평구 녹번동. 지하철 3호선 녹번역 1번 출구로 나오자 대로변에 주민 커뮤니티 센터를 끼고 있는 ‘힐스테이트 녹번’ 아파트가 보였다. 지난해 10월 입주한 새아파트다. 이 아파트 바로 옆에는 ‘래미안 베라힐즈’와 ‘북한산 푸르지오’가 차례로 자리잡고 있다. 모두 1000가구가 넘는 대단지 아파트다.
북한산 자락에 있는 은평구 녹번동은 지하철 3호선을 이용하면 서울 강북 도심까지 20~30분이면 닿을 수 있어 교통 환경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녹번동은 수도권 주택 수요자들의 관심 지역에선 벗어나 있었다.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녹번동은 아파트에 비해 낡은 다세대·다가구 주택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최근 새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까지 100가구 넘는 아파트 단지가 단 3개뿐이었다. 이 중 가장 최근 지어진 단지가 올해 입주 17년이 된 ‘녹번JR’(2002년 9월 입주)이라는 아파트 단지로 341가구 규모였다. 이 정도로 개발이 더디다 보니 주택시장에선 은평구 내에서도 불광동에 한참 뒤쳐저 있었다.
하지만, 최근 재개발 사업이 속도를 내면서 녹번동이 서울의 새로운 주거 타운으로 부상하고 있다. 집값도 강세다. 은평구의 84 ㎡(이하 전용 면적 기준) 아파트 실거래가격이 최근 9억2500만원을 찍었다. 114 ㎡는 9억5000만원까지 올라 10억원대 진입을 코 앞에 두고 있다.
■동네에서 입지 가장 좋은 곳에 대형 아파트 단지 입주…‘싼 맛에 찾던 동네’ 이미지 벗기 시작
녹번동 재개발 사업은 지난 2004년부터 시작됐다. 원래 지하철 3호선 녹번역 인근 1개 구역이 재개발 사업 대상지였는데, 2007년 3개 구역으로 나뉘면서 각 구역 사업이 구체화되고 진행 속도도 빨라졌다. 녹번1-3구역을 재개발한 ‘북한산 푸르지오(1230가구)’ 아파트의 사업 속도가 가장 빨라 지난 2015년 7월 입주했다. 하지만 이 아파트 단지는 녹번동 재개발 구역 3곳 중에서는 입지가 가장 애매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단지다. 녹번역과 불광역 중간에 걸쳐있어 각 역까지 걸어서 10분 넘게 걸리는게 흠이었다.
하지만 동네 첫 대규모 단지라는 점만으로도 녹번동 주택 시장에서 주목을 받았다. KB부동산에 따르면 북한산 푸르지오 입주 전인 2014년 녹번동 아파트 시세는 3.3 ㎡ (1평)당 1310만원으로 서울 평균의 절반 수준이었는데, 새아파트가 들어선 후인 2016년에는 1745만원으로 400만원 넘게 뛰었다. 절대적인 아파트 수가 자체가 워낙 적어 1000가구 이상 아파트 단지 한 곳의 시세가 동네 아파트 시세 전체를 끌어 올리는 형국이었다.
이어 녹번1-1구역에 ‘힐스테이트 녹번(2018년 10월 입주, 952가구)’, 녹번1-2구역에 ‘래미안 베라힐즈(2019년 1월 입주, 1305가구)’가 줄줄이 들어서면서 시세가 더 올랐다. 올해 3월 기준 2438만원으로 서울 평균(2659만원)과 얼추 비슷한 수준이 됐다.
■84 ㎡ 시세가 10억원 코앞까지
새 아파트촌이 들어서기 시작한 녹번동 집값은 현재 84 ㎡ 아파트 실거래가가 10억원에 가까울 정도로 뛴 상태다. 녹번동 소나무공인중개사사무소 관계자는 “원래 녹번동은 서울 집값이 아무리 올라도 상관 없는 동네였는데, 최근엔 새 아파트가 들어서 작년 서울 집값 급등기에 이 동네 아파트 값도 함께 뛰어 올랐다”고 말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북한산 푸르지오 84 ㎡는 지난해 9월 9억2500만원(20층)에 거래됐다. 1월 비슷한 층이 6억4500만원(18층)에 팔린 것과 비교하면 8개월만에 집값이 2억8000만원 올랐다. 5억2000만~5억5000만원 선이던 분양가보다는 3억7500만~4억500만원 높은 금액이다. 최근 입주한 힐스테이트 녹번과 래미안 베라힐즈는 아직 등록된 실거래 사례가 없다.
84㎡ 기준으로 녹번동 새 아파트 전세는 3억7000만~5억2000만원 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다만, 올 들어 서울 주택 시장이 급랭하면서 녹번동 주택 매매 시장도 영향을 받고 있다.
지역 중개업소에선 아직도 지역의 개발 호재가 많아 집값 상승 여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신분당선 서북부 연장사업과 GTX-A노선 사업이다. 두 노선 모두 녹번역을 직접 통과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근 독바위역과 연신내역을 각각 포함한다. 녹번역에서 지하철로 2개 정거장만 이동하면 된다. 만약 노선이 개통하면 강남이나 분당 판교까지 25~30분 걸릴 정도로 교통이 개선된다.
인근의 응암1구역, 응암2구역 재개발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녹번동 가치를 높이는 요소다. 두 구역 모두 녹번역 3번 출구와 붙어있어 사실상 녹번동과 생활권을 공유하는 입지다. 응암1구역에 ‘힐스테이트 녹번역(2021년 4월 입주, 879가구)’, 응암2구역에 ‘녹번역e편한세상캐슬(2020년 5월 입주, 2441가구)’이 들어선다.
■학군·교통·생활 인프라 한계 명확…집값 상승에는 한계 있어
녹번동 일대의 집값 상승 기대감이 높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한계도 있다. 우선 학부모들이 선호하는 학교나 학원가가 없고, 대형 마트도 없다. 지하철 3호선이 ‘알짜 노선’이기는 하지만, 일산 등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 하는 시민이 함께 쓰기 때문에 전철에 몸을 싣기 조차 힘들 때가 많다. 도심으로 가는 거의 유일한 도로인 통일로 역시 교통 정체로 악명이 높다.
고준석 동국대 겸임교수는 “녹번동의 입지가 나쁘지는 않지만 한계도 명확한 지역”이라며 “교통 호재 영향으로 새 아파트 단지의 소형 주택은 강세를 유지하겠지만, 중·대형은 크게 투자 매력이 없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