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오후 서울 중구 입정동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대로변에 금속, 유리, 기계 등을 파는 공구점들과 냉면집 ‘을지면옥’, ‘조선옥’ 등 오래된 식당들이 영업하고 있었다. 을지로를 따라 늘어선 공구상들과 이른바 ‘노포’(老鋪)는 최근 을지면옥 재개발 논란으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른 세운재정비촉진지구의 전형적인 이미지이다.
하지만 골목으로 10m만 들어가니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났다. 세운재정비구역의 안쪽, 면적으로는 90% 정도에 속하는 지역은 서울 4대문 내에 존재하는 유일한 ‘공장 지대’다. 두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길 양쪽에 쓰러질 듯 낡은 건물들은 대부분 금속 제품을 만들거나 주물·연마 공장들이다.
이곳 영세 공장 1000여 곳은 대부분 개점 휴업했거나 아예 문을 닫았다. 금속 스프링을 가공하는 ‘일성스프링’에 들어가자, 사장과 직원 1명만이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김두철(69) 사장은 “벌써 몇 년째 장사가 안돼 임대료조차 못낸다”며 “이주 보상비를 받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없어 버틸 뿐”이라고 말했다.
세운재정비사업은 옛 세운상가와 주변 공구거리에 주상복합 건물을 짓는 사업이다. 2006년부터 추진했다. 그러나 ‘을지면옥’ 보존 논란으로 전면 중단되면서 이곳에 15~20평 땅을 가진 중소 토지주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이들은 “그동안 여러 차례 바뀌었던 서울시 방침에 맞춰 사업시행인가 등 필요한 절차를 밟아왔다”며 “난데없이 ‘노포 보존’ 주장이 나오면서 박원순 시장이 말을 뒤집는 바람에 피해가 막심하다”고 반발하고 있다.
■ 월세 대신 ‘빚’ 내는 공장만 1000여곳
세운재정비촉진지구의 조합원 600여명 중 약 80%는 이렇게 20평 내외 토지를 소유한 중소 토지주다. 대부분 70~80대 노인이다. 세입자들이 내는 월세말고는 소득이 거의 없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땅이지만 워낙 오랫동안 슬럼가로 방치해 세 들어 있는 공장·가게는 대부분 영세하다. 현재 이 지역 토지 감정가는 3.3㎡(1평)당 3000만원 안팎이다. 토지주가 20평 짜리 땅을 갖고 있다면 경기도 내 중소형 아파트 가격 한 채를 갖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토지주 김모(81)씨는 20평짜리 건물을 영세 공장 4곳에 쪼개서 임대하고 있다. 각 공장에서 30만~40만원 정도 월세를 받는다. 14년 전부터 재개발을 추진한 만큼 임대료는 10년 전이나 똑같다. 세입자들 형편은 더 어렵다. 세들어 있는 공장 4곳 중 2곳은 수년째 월세를 내지 못해 보증금을 전부 까먹고도 각각 1000만원, 600만원씩 빚을 지고 있다.
공장이 밀집한 세운 3구역 가운데 대로변 3개 블록(3-1,4,5)은 이미 철거에 들어갔다. 대로변 공구 판매상(도매상)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안쪽에 있는 공장들은 장사가 더 안 된다. 토지주 김남술(72)씨는 “세입자를 새로 구할 수도 없으니 재개발될 때까지 매년 꼬박꼬박 재산세만 내면서 버틸 수밖에 없다”며 “재개발이 늦어지면서 상당수 토지주들은 말 그대로 죽을 맛”이라고 말했다.
■ 박원순 시장 말 한마디에…서울시 “을지면옥 보존”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사업이 전면 중단된 이유는 올해 초 느닷없이 ‘을지면옥’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튀어 나오자, 박원순 서울시장이 갑자기 제동을 걸어버린 탓이다. 여론 눈치를 보던 박 시장은 “을지로 일대 재개발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선언했다. 서울시 관계자도 “연말까지 도심 전통 산업과 노포 보존을 위한 종합대책을 마련하겠다”며 사업을 전면 중단시켰다.
토지주들은 상당히 격앙된 상황이다. 최근에 박 시장의 결정을 취소시켜달라며 청와대 게시판에 청원을 올리기도 했다. 서울시가 박 시장의 말 한마디 때문에 그동안 내렸던 결정을 180도 뒤집었기 때문이다. 2011년 박 시장이 취임하면서 전면 중단됐던 사업은 2014년 겨우 재개됐다. 당시에도 일부 지역은 존치하는 방안을 논의했지만 을지면옥이나 조선옥은 존치 계획이 없었다. 이후 2017년 4월 을지면옥이 속한 3-2구역은 철거 직전 단계인 사업시행인가까지 받았다.
문제는 을지면옥 보존 결정이 사회적 합의가 아닌 일부의 여론과 박 시장의 말 한마디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을지면옥·양미옥·조선옥·을지다방 등 4곳은 2015년 서울시가 ‘생활유산’으로 지정했지만 그렇다고 재개발 사업이 중단될 이유는 없다. 100년 된 건물도 아니고, 약 40년 전에 지은 쓰러져 가는 벽돌 집에 보존할 가치가 있는지도 의문이란 의견이 다수다. 이미 종로 일대 수많은 노포들이 새로 개발한 점포로 이전해 영업하고 있어 형평성에도 어긋난다.
시행사인 한호건설 측은 “을지면옥(토지 137평)은 주변 중소 토지주보다 4배 이상 높은 평당 2억원씩 총 274억원의 보상금을 요구하며 버티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을지면옥 측은 “토지 보상비로 평당 2억원을 요구한 적도 없고, 시행사와 접촉한 적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 SH공사가 추진하는 4구역은 노포 있어도 사업 진행
을지면옥 때문에 멈춰선 세운3구역과 달리 길 하나 건너편 4구역은 노포을 이주시키면서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곳에는 35년 된 을지면옥보다 훨씬 오래된 노포들이 많다. 이 중 예지동 원조함흥냉면(67년째 영업)은 4구역 철거와 함께 이주할 계획이고, 곰보함흥냉면(50년 영업)은 일찌감치 철거에 대비해 인근 세운스퀘어로 이전했다.
세운4구역은 토지주들이 주체가 돼 추진하는 3구역과 달리 서울시 산하 SH공사가 시행한다. 4구역은 지난 15일 토지주 397명을 대상으로 분양신청 설명회를 열었다. 구용모 세운재정비촉진지구 3구역 사무장은 “노포를 보호한다면서 SH공사가 시행하는 4구역의 노포를 이주시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며 “을지면옥 주인 같은 수백억 자산가 1~2명을 위해 적법하게 추진되던 사업을 중단시키는 것은 박 시장의 명백한 월권행위”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