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은 정부가 내놓은 고강도 규제책으로 분절되고 왜곡된 상태죠. 예전에는 펀더멘털(근본 요소·fundamental)이 주택 가격을 결정했지만 이제는 기존의 상승·하락 논리가 전혀 통하지 않는 ‘무법 시장’이 됐다는 것을 투자자나 실수요자 모두 알고 있어야 합니다.”
최근 열린 ‘2019 대한민국 재테크 박람회’에서 ‘한국 부동산, 세그먼트로 투자하라’는 주제로 강단에 선 채상욱 하나금융투자 연구위원. 그는 그동안 집값 상승론을 꾸준히 주장해온 여의도 증권가 대표 애널리스트다. 하지만 이번 강연에서는 “내년 서울 집값은 8% 하락할 것”이란 예상 밖 전망을 내놓았다. 그는 왜 이렇게 변했을까.
■“한국 주택 시장은 실수요자 아닌 유주택자가 움직여”
채상욱 연구위원은 먼저 우리나라 부동산 수요의 특징을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서울 주택 시장은 실수요가 아닌 유주택자들의 수요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며 “다(多) 주택자들이 집을 추가로 사서 전월세를 제공하는 경우가 무주택자가 자본을 축적해 집을 장만할 확률보다 높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무주택자보다 유주택자가 더 많다. 전체 2000만 가구 중 43%(865만 가구)가 무주택자다. 반면 1주택자는 800만 가구, 2주택 이상 다주택자는 300만 가구 정도로 전체의 57%를 차지한다.
채상욱 연구위원은 정부의 고강도 부동산 대책이 발표되기 전까지 수요자들은 아파트를 고를 때 ‘펀더멘털’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단지 규모나 입주연도, 내부 구조나 마감 수준, 입지 등 각자 중요하게 생각하는 상품성을 중점적으로 따졌다는 것. 채 연구위원은 “펀더멘털 중심의 구매 의사 결정 시스템에서는 실수요자가 됐든, 투자자가 됐든 주택 수요가 광범위하게 분산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85㎡ 이하, 공시가격 6억원 이하 주택에 수요 집중
그런데 이런 정상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 바로 정부의 고강도 부동산 규제 대책이 발표되면서 고르게 퍼져있던 투자 수요가 분절되고 집중되기 시작한 것이다. 채 연구위원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위적인 시장 통제로 인해 수요가 ‘전용면적 85㎡ 이하이면서 공시가격 6억원 이하인 주택’으로 무조건적으로 쏠리게 됐다”고 했다. 바로 ‘시장의 세그먼트화’다.
채 위원은 1차적으로 시장 세그먼트를 촉발한 계기로 8·2부동산 대책을 지목했다. 그는 “8·2 대책이 나오면서 85㎡ 이하 주택에 투자 수요가 집중됐다”고 했다. 85㎡ 이하 주택은 장기보유특별공제 혜택을 더 많이 주고, 임대사업자로 등록하면 비과세 혜택까지 주겠다고 한 것이 수요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실제 20~30평대를 선호하는 실수요자와 투자 수요가 완벽하게 일치하면서 소형 주택 중심으로 서울 집값이 폭등했다는 분석이다.
9·13 대책은 세그먼트화에 또 다시 기름을 부었다. 공시가격 6억원(수도권) 초과 주택에 대한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 기준을 강화한 것. 서울에는 85㎡ 이하면서 공시가격 6억원 이하 주택은 거의 없다. 결국 투자 수요가 이런 규제에 해당하지 않는 경기도 수원·부천·인천·구리·남양주·하남 등지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최근 서울 주택 시장이 급격히 냉각된 대신 수도권 외곽 지역이 반사이익을 누린다는 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채 연구위원은 “이렇게 인위적으로 세그먼트화한 시장에서는 ‘우리집은 역세권이고 대단지인데 왜 집값이 떨어지느냐’는 식의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며 “변화한 부동산 시장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앞으로 추가 발표될 정부 대책에도 대응할 수 있다”고 했다.
■“내년 서울 집값 내리고 대형 아파트 주목”
내년엔 주택 시장이 어떻게 움직일까. 채 연구위원은 “종부세 세율과 공시가격 반영률이 현실화하면 결국 세금 부담으로 주택을 팔 수 밖에 없는 다주택자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며 “서울 집값은 8% 정도 하락하고, 반대로 비규제지역은 3~4% 정도 상승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로 최근 종부세 세율을 올리고 3주택 이상 보유자에게는 세부담 인상 상한선을 전년도 세액의 300%까지 올리는 세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국회예산정책처는 만약 시세의 50~70%인 공시가격 현실화율이 5%포인트만 올라도 종부세 부담이 68.6% 증가한다고 밝혔다.
채 연구위원은 “지금은 무주택가구가 다주택자와 비슷한 강도의 대출 규제를 받고 있지만, 정부가 이를 완화한다면 다주택자가 내놓는 주택을 실수요자가 충분히 살 수 있는 구조가 된다”며 “정부의 부동산 규제책이 먹힌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앞으로 서울 대형 평수 아파트가 귀해질 것”이라고 했다. 1주택자가 다주택자가 될 수 있는 사다리가 막혔기 때문에 여유 자금이 있어도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즉 기존 단지에서 더 넓은 주택형으로 옮기거나 입지와 상품성이 더 좋은 단지로 수평 이동하는 것 뿐이다. 채 연구위원은 실수요자의 경우 대형 주택으로의 이동을 더 많이 선택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 서울의 1인당 주거 면적은 30㎡로, 일본(40㎡)이나 미국(60㎡)에 비해 작다. 서울에서 단 2%에 불과한 대형 아파트에 사는 것만으로도 희소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채 연구위원은 “집을 팔든, 사든 현재 주택을 보유한 국민 모두가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것”이라며 “세그먼트화한 시장을 각자 상황에 맞게 최대한 활용해 부동산 투자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