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오전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지하철 신사역 8번 출구에서 200m쯤 걸어가자 대로변 왼쪽에 CJ그룹이 운영하는 올리브영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옆에는 대형 문구·펜시 전문점인 ‘아트박스’가 있었다. 다시 300m 정도 걸었더니 올해 1월 들어선 애플스토어가 나왔다. 대로변 오른쪽도 비슷했다. 400m 정도 걷는 동안 세계 최대 커피 브랜드인 스타벅스와 국내 커피 체인점인 커피스미스 등이 보였다. 재규어 자동차 매장과 글로벌 명품 브랜드인 불가리도 나타났다.
가로수길를 차지한 대기업 매장은 가로 폭이 15~30m에 이르는 대규모다. 사이사이로 의류와 액세서리를 파는 가로 폭 3~5m의 작은 가게들이 대기업 브랜드 매장 사이에서 ‘새우’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당초 가로수로 심은 은행나무가 길게 늘어서 ‘예쁜’ 골목길로 유명했던 이곳은 2000년대 후반 이색적인 카페와 레스토랑, 뷰티숍 등이 자리잡으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국내외 대기업이 운영하는 쇼핑몰이나 백화점만 가면 어디나 볼 수 있는 그저그런 상권으로 바뀌었다.
평일 오전이어서 오가는 이들이 많지 않았지만 점심시간이 가까워오자 신사동 일대 대형 빌딩에서 직장인들이 나오며 시끌벅적해졌다. 이들은 대부분 ‘가로수길 뒷골목’격인 이른바 ‘세로수길’ 일대 음식점으로 향했다. 세로수길은 전형적인 ‘먹자골목’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가로수길처럼 이색적이고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이나 카페도 보였다. 하지만 세로수길에도 대형 브랜드 매장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
가로수길은 신사역 8번 출구 200m지점에 위치한 기업은행부터 신사중학교까지를 말한다. 하지만 세로수길은 정확하게 특정 골목을 말하는 개념은 아니다. 10여년 전부터 서울의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던 가로수길을 대형 브랜드 매장이 점령하면서 임대료가 치솟자, 기존에 있던 개성있는 카페와 식당들이 뒷길로 밀려나면서 생긴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로수길은 ‘가로수길의 뒷골목’쯤 된다.
문제는 최근 ‘세로수길’도 대형 브랜드 매장이 차지하기 시작하면서 임대료와 건물 가격이 치솟고 있는 것이다.
■‘대형 스트리트 쇼핑몰’처럼 변하는 가로수·세로수길
가로수길을 대기업들이 점령했지만 최근까지 가로수길 대형 브랜드 매장과 세로수길 카페·식당 사이에는 사실 ‘공생 관계’가 형성돼 있었다. 가로수길의 A부동산 중개업소 관계자는 “가로수길에서 쇼핑한 후 세로수길에서 밥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며 “가로수길 대형 매장이 집객 효과가 있기 때문에 임대료가 저렴한 세로수길 식당·카페도 먹고 살만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2~3년 사이 세로수길에도 대기업과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현재는 글로벌 SPA브랜드 H&M의 단독 브랜드인 ‘COS’, 남성의류전문점 ‘루이스클럽’, 여성 화장품 브랜드 ‘이니스프리’ 등이 들어섰다. 배스킨라빈스, 투썸플레이스, 할리스, 빽다방 등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프렌차이즈 외식·커피 브랜드 매장도 많다. 백화점이나 쇼핑몰에 가면 볼 수 있는 그저그런 체인점 매장들이 세로수길을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대형 브랜드 매장이 세로수길까지 파고 들면서 임대료는 치솟고 있다. 신사동 일대 부동산 중개업소들에 따르면 세로수길 주요 매장의 임대료는 2~3년만해도 3.3 ㎡(1평)당 20만~30만원이었다. 최근엔 40만~70만원까지 배 이상 뛰었다. 강남 핵심인 신사동 전체 상가 평균 임대료는 3.3㎡당 14만원(부동산114 조사자료) 안팎이지만, 현재 세로수길 임대료는 3~5배 정도 비싸다.
건물 매매가격도 천정부지다. 세로수길을 대표하는 할리스커피 건물은 5년 전 40억원대에 팔렸지만 현재 90억원을 호가한다. 5층짜리 이 빌딩은 가수 리쌍이 소유해 ‘리쌍 빌딩’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신세계가 소유한 건물 역시 3년 전 매매가격이 108억원에서 작년 130억원에 팔렸다.
세로수길 임대료가 급격히 오르면서 상인들도 떠나고 있다. A부동산 중개업소 관계자는 “4~5년 전 가로수길에서 카페와 식당이 밀려났던 현상이 세로수길에서 재연되고 있다”며 “아무리 가로수길, 세로수길이 유명해져도 유동 인구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데, 임대료만 2~3배씩 오르다보니 상인들이 떠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이 늘어나면서 세로수길의 매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곳을 자주 찾는다는 회사원 김모(32·여)씨는 “세로수길에 프렌차이즈 식당, 카페, 옷가게가 몰려 있으면 그냥 대기업 쇼핑몰과 아무런 차이가 없지 않느냐”며 “스타벅스나 빽다방 커피 먹으려고 세로수길을 찾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 “스타벅스가 골목상권 망치는 주범이 될 수 있어”
전문가들은 세로수길까지 대기업, 대형 프렌차이즈 업체들이 점령하면 결국엔 상권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권강수 한국창업부동산연구원 이사는 “개성있는 맛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카페·식당이 많다는 것이 세로수길 같은 골목상권의 장점인데 대형 프렌차이즈 매장이 너무 많으면 역효과가 난다”며 “브랜드 파워가 강력한 스타벅스도 이런 골목상권에선 상권을 망치는 주범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로수길은 대기업들이 전면적으로 진출하기는 어렵다는 분석도 있다. 가로수길은 매출보다 홍보 효과를 노리며 진출하는데 세로수길이 아직 그 정도까지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물 크기에도 한계가 있다. 안성룡 우리은행 WM자문센터 부동산팀장은 “가로수길은 건물이 커 대기업 브랜드가 진출하기에 적합하지만 세로수길은 대부분 건물 자체가 작다”며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도 상인들 목소리를 반영해 골목상권의 개성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