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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금 폭락·공실 속출…무너지는 경리단길

뉴스 김리영 기자
입력 2018.05.29 04:00

지난 11일 오후 서울 용산구의 지하철 녹사평역에서 나와 300m 정도 걸어 경리단길 입구로 들어갔다. 오르막인 경리단길 입구의 전 국군재정관리단 정문 맞은편에는 최근 3~4년 전부터 유행하는 인형뽑기 가게가 자리잡고 있었다.

원래 이 자리는 유명 프랜차이즈 음료 ‘쥬씨’가 있었다. 쥬씨는 경리단길 핵심인 이곳에 2015년 말 1억2000만원의 권리금을 내고 오픈했다. 하지만 2016년 말 인형뽑기 가게에 자리를 내줬다. 이 점포의 권리금은 6분의 1 수준까지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골목상권의 대표격인 서울 용산 경리단길과 요즘 새로 뜨는 해방촌길. /땅집고


경리단길은 10여 전부터 이태원의 비싼 임대료를 피해 자리잡은 개성 있는 음식점과 카페가 들어서면서 인기를 끌었다. 식당은 작아도 실력있는 유학파 ‘셰프’들이 운영하는 식당이 많았다. 가게 인테리어도 독특해 연인들의 필수 데이트 코스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상권으로 뜬지 10년도 안돼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경리단길을 주름잡던 가게들은 소리없이 사라지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높은 권리금을 내야 입점할 수 있던 대로변 1층 상가에도 공실(空室)이 발생하고 있다.

■권리금 없는 가게도 속속 등장

비어있는 경리단길 대로변 상가 유리창에 임대 문의 전단이 붙어있다. /김리영 기자


이날 찾아간 경리단길은 평일 낮이었지만 젊은이와 외국인들이 오가고 있었다. 붐빌 정도는 아니어도 줄을 길게 늘어선 식당도 있고, 맛집을 찾으려는 대학생들이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는 모습도 보였다. 경리단길은 녹사평역에서 300m쯤 떨어진 옛 국군재정관리단 정문 옆길부터 하얏트 호텔로 이어지는 일대를 말한다. 국군재정관리단의 옛 이름이 육군중앙경리단이어서 경리단길이라고 불렸다.

이곳은 원래 주차가 어렵고 경사가 심해 교통이나 지리적인 여건만 보면 상권이 발달하기 힘든 곳이다. 반면 임대료가 저렴했다. 상가 건물과 단독주택 1층을 개조해 젊은 상인들과 셰프들이 츄러스 가게, 펍 형태의 주점, 개인 카페나 레스토랑, 루프탑 식당 등 개성 넘치는 가게가 개점하며 위상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길을 따라 올라가보니 경리단길 주변 상가 중에 텅텅 빈 곳이 곳곳에서 보였다. 경리단길 메인 도로 뒷편에도 빈 건물이 눈에 띄었다. 대로변 부동산중개업소 전면 유리창에는 ‘급매물’ 전단이 붙어있었다. 전단에는 ‘무(無)권리’라고 적힌 것도 있었다.

경리단길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에 나붙은 매물판. '상가 1층 무권리'라고 적힌 매물표도 보인다. /김리영 기자


가장 먼저 나타난 변화는 권리금이 하락하거나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부동산 중개업소 관계자는 “건물주들이 임대료는 내리지 않고 버티는데 세입자끼리 주고 받는 권리금은 없어지는 추세”라고 했다. 실제 경리단길 상가 임대료는 가파르게 오른 수준에서 멈춰 있다. 부동산 중개업소들에 따르면 경리단길 임대료는 전용 33 ㎡(약 10평) 기준으로 월150만~250만원이다.

이태원동 일대 상가 임대료 추이. /부동산114


경리단길 상권 위축 현상은 다른 지역처럼 ‘젠트리피케이션(둥지 내몰림)’이라고 보기 힘든 측면이 있다. 젠트리피케이션 지역은 영세 세입자가 기발한 아이디어와 서비스를 제공해 건물과 거리 위상을 높여 놓으면, 이곳에 대기업 프렌차이즈 가게나 상점 등이 밀고 들어와 임대료가 더 치솟는 현상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경리단길에는 대기업 프랜차이즈가 거의 들어오지 않고 있다. A부동산 중개업소 대표는 “대기업이 들어오고 싶어도 큰 건물이 있어야 홍보 효과가 나는데, 경리단길은 건물이 워낙 작아 쉽게 들어올 수 없다”고 했다.

새로운 골목상권으로 떠오른 경의선 숲길. /조선DB


전문가들은 경리단길 위축의 가장 큰 원인으로 서울 곳곳에 경리단길과 비슷한 복제 거리가 생겼다는 점을 꼽는다. 대표적인 곳이 망원동, 상수동, 연남동, 서울대입구역 일대다. 이런 골목길 상권은 경리단길의 ‘아류’이지만 교통은 더 좋아 경리단길이 가진 매력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경리단길 건너편에 생긴 ‘해방촌길’도 강력한 경쟁자다. 해방촌길은 경리단길보다 낮은 임대료가 경쟁력이다. 해방촌길에는 지금도 상가가 곳곳에 문을 열고 있고, 기존 주택을 개조하는 공사도 한창이다. 해방촌길의 한 상인은 “임대료가 50만~100만원 정도로 저렴하고 손님들도 늘어 장사하기가 나쁘지 않다”고 했다.

■경쟁력 잃어도 임대료는 천정부지

경리단길 상권은 당분간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빌딩전문 중개회사 ‘빌딩드림’ 김영정 실장은 “경리단길 공실률은 높은 수준이 아니라고 해도 권리금이 하락하고 절대 공실이 나지 않던 상가가 비어있다는 것은 그만큼 유동 인구가 줄고 상권이 위축된 것으로 해석된다”고 했다.

경리단길 뒷골목 상가들. /김리영 기자


경리단길 건물 소유자들 사이에는 ‘용산공원 개발사업’이 호재로 거론되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용산공원은 현재 녹사평역에서 300m떨어진 미군기지 21번 게이트 방면으로 출입구가 나도록 계획됐다. 미군부대 21번 게이트는 해방촌 진입로 바로 앞에 있고 경리단길과는 지하보도를 이용해 300m만 이동하면 된다. 경리단길 C부동산 중개업소 관계자는 “경리단길 건물주들은 공원 부지가 워낙 크기 때문에 출입구와 가까운 경리단길과 해방촌 상권이 더 발달할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했다.

용산공원 동선 계획. 현재 경리단길 입구와 가까운 미군게이트에 출입구가 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국토교통부 제공


문제는 시간이다. 공원 개발은 확실하지만 서울시와 국토부는 아직도 구체적인 계획을 확정하지 못했다. 국토부가 6월에 마스터플랜을 발표할 계획이지만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하고 토지 정화 작업과 공사까지 끝내려면 최소 10년 넘게 걸린다.

김민영 부동산114 선임연구원은 “공원 개발까지 시간이 꽤나 걸리는 만큼 우선 경리단길 핵심 상권의 공실이 장기화하는 것을 막는 게 필요하다”며 “결국 임대료가 지금보다 낮아져야 입점한 가게나 카페도 유지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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