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집고

내일 당장 전세 제도가 없어진다면…

뉴스 한상혁 기자
입력 2018.03.26 06:31

전세(傳貰)는 한국 주택 시장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임차 제도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를 제외한 국가에서 주택 임대차 방식은 대부분 월세다. 매달 임차료를 내거나 1년치를 한꺼번에 낸다. 집값의 50~90% 정도인 몫돈을 맡겨 놓고 남의 집에 사는 전세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임대 제도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들은 임차 기간이 끝나고 보증금 전액을 되돌려주는 전세 제도를 접하고 신기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주택 시장은 전세 제도 때문에 다른 나라와는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 우선 집주인들은 전세 보증금을 이용해 집값의 10~20%만 가지고 집을 소유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주택에 대한 투기가 만연하게 됐다는 부정적인 분석도 나온다. 반면 세입자들이 낮은 비용으로 거주할 수 있는 전세가 주거 안전판 역할을 한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서울의 한 아파트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에 매매와 전세 시세를 적은 안내판이 놓여있다. /조선DB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전세 제도가 없어진다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 그럴리는 없겠지만 예를 들어 당장 내일부터 전세 제도가 불법이 된다면….

땅집고는 전문가 의견을 물어 ‘전세 제도가 없어진’ 한국 주택 시장의 미래 모습을 상상해봤다.

■“전세 없어지면…집값은 하락할 것”

전세가 없다면 주택 가격은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고 대부분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우선 전세 제도가 불법이 된다면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돌려줄 여유 자금이 없는 집주인은 당장 집을 팔 수밖에 없다. 양지영 R&C 연구소장은 “다량의 매물이 한꺼번에 시장에 쏟아지면서 일시적으로 집값이 급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주택 가격은 중장기적으로도 하락 안정세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 심교언 건국대 교수는 “전세 제도가 집주인 입장에서는 주택 구입에 필요한 자금의 50~80%를 사실상 무이자로 빌리는 매입 자금 대출 성격을 갖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재는 전세 제도를 이용해 집값의 20~30%만 가지고 레버리지(지렛대) 효과를 극대화해 큰 시세 차익을 노리는 투자법, 이른바 갭(gap) 투자가 가능하다. 하지만 전세가 없어진다면 주택 구입을 위해 이자율이 높은 은행 대출을 이용할 수밖에 없어 매입 수요가 줄어든다.

전문가 5인의 전세가 사라질 경우 주택 시장 전망. /땅집고


전세는 주택 가격 하락을 막는 하방 지지선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집을 가진 사람이 사업 등의 이유로 큰 돈이 필요할 때 현재는 집을 팔지 않고 전세로 내놓아 목돈을 마련할 수 있다. 전세가 없다면 이런 사람들의 상당수가 집을 팔 수밖에 없다.

특히 비인기 지역이나 공급 과잉 지역의 가격 하락 폭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함영진 부동산114리서치센터장은 “비인기 지역은 전세를 끼고 매매한 후 전세금 상승으로 가격이 오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전세가 없다면 집값 상승에 대한 기대가 적은 지역이 더 크게 하락할 것”이라고 했다.

■“월세 오르고, 주거비 부담은 늘어”

월세 가격은 오를 가능성이 높다. 전세가 없다면 임차 시장은 월세만으로 이뤄지게 된다. 특히 집을 구입할만한 소득이나 재산이 없다면 목돈이 들지 않는 월세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는 월세 수요를 늘려 월세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박원갑 국민은행 WM스타자문단 수석위원은 “현재 우리나라 아파트 월세 수익률은 연 2~3%밖에 되지 않아 선진국보다 낮다”면서 “전세가 사라진다면 선진국 수준으로 맞춰지면서 지금보다 2~3%포인트는 더 올라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전세가 사라지면 주택 산업에도 변화가 불가피해진다. 함영진 센터장은 “월세가 보편화하면서 선진국처럼 기업형 임대주택이 등장하고 임대관리 등 관련 산업이 성장할 것”이라고 했다. 박원갑 수석위원도 “월세받는 아파트가 괜찮은 수익형 상품으로 인기가 높아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전세가 없어지면 임차인들의 주거비 부담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작년 말 공개한 ‘더 나은 삶 지수(BLI·Better Life Index)’을 보면 한국인은 가구당 가처분소득 가운데 15.2%를 주거비로 지출한다. 이는 해당 통계가 공개된 38개국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한국에만 있는 전세 제도가 주거비 부담을 낮춰주는 덕분이다. 심교언 교수는 “전세 세입자의 주거비 부담은 소득의 10% 정도, 월세는 20% 정도로 전세의 주거비 부담이 절반 이상 낮다”고 말했다.

■“전세는 필요한 곳에 돈 흐르게 해…나쁘다고 볼 수 없어”

매년 줄어들던 전국 주택 전세 거래량은 지난해 다시 증가했다. /자료=국토교통부


전문가들은 전세 제도로 주택 가격이 높아지는 측면이 있지만, 현재 시점에서 볼 때 긍정적인 점도 적지 않다고 말한다. 전세는 무주택 세입자의 주거 비용을 낮추고, 주택 매수자에게는 대출 이자 비용을 낮춰주는 역할을 한다. 바꿔 말하면 여유 자금이 있는 사람에게서 자금이 필요한 사람에게로 돈을 순환시키는 사적 금융(金融) 역할을 한다. 전세가 없다면 필요할 때 집을 사기 어려워지고, 집이 필요없을 때도 집을 사야 하는 등 거래 비용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목돈이 없는 초년생 시절에는 월세, 어느정도 종잣돈이 모였을 때는 전세로, 또 집을 살 여력이 될 때는 매매로 점차 주거의 상향 이동이 가능한 우리나라 주택 시장이 외국에 비해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며 “전세가 금방 없어질리는 없겠지만, 없어진다고 하면 서민 주거 비용이 늘고 전체적인 경제 상황에도 오히려 부작용이 클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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