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오전 서울 노원구 상계동 상계주공아파트 3단지. 외부 차량 불법 주차에 대한 단속 문구가 곳곳에 붙어있었다. 대낮인데도 지상에는 차량이 빽빽해 주차 공간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아파트 주차장 수용 규모는 가구당 0.5대에 불과하다. 한 아파트 경비원은 “주차장이 부족해 도로변 주차 차량이 수두룩하고, 외부 차량이 잘못 들어왔다가 주민들과 싸움이 나기도 한다”고 했다.
1980년대 후반 이른바 ‘베드타운’으로 만든 서울 상계동 주공아파트 단지. 총 4만여가구에 달하는 서울 동북부 최대 아파트 단지다. 하지만 서울에서 대표적인 노후 주거지로 꼽힌다. 비좁은 주차장, 낡은 배관, 입주민 편의시설 부족 등으로 주거 환경이 열악해 집값도 낮다.
상계동 주민들은 재건축 가능 연한(30년)을 맞으면서 기존 아파트를 재건축 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최근 찬물을 끼얹는 정책이 발표됐다. 국토교통부가 지난 2월 “재건축 안전진단 기준을 정상화하겠다”며 구조 안전에 문제없는 단지의 재건축을 사실상 막아버린 것.
이 발표 이후 ‘비강남권 죽이기 저지 범국민 대책본부(가칭)’라는 단체가 결성됐고 정부를 비난하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서울 양천구 목동 아파트 주민들이 주도했고, 노원구 월계동 주민들도 가세했다. 그런데 큰 반발이 있을 것으로 예상됐던 상계동 주민들은 정작 단체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통상 재건축 추진 단지에서는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도 활발한데 상계동 주민들은 온라인 상에서도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땅집고는 상계동 주공아파트를 찾아 그 원인을 취재했다.
■30년 다 된 단지 약 4만 가구…재건축 사업성도 낮아
상계주공아파트는 1980년대 후반 상계신시가지 건설 사업으로 조성됐다. 서민·중산층 주택을 공급하기 위한 대책으로 만들어져 30~40㎡(이하 전용면적)대 주택형이 많다. 수락산·북한산 등에 둘러싸여 자연환경이 좋고 지하철 7호선 노원역과 창동역(1·4호선) 등 대중교통 노선이 많아 서울 출퇴근이 용이한 대표적인 베드타운으로 기능했다.
올 3월 현재 상계동에는 재건축 가능 연한을 채웠거나 임박한 아파트 단지가 총 23개로 약 4만 가구에 달한다. 이중 재건축이 진행 중이거나 가시화된 단지는 철거 중인 상계주공 8단지와 안전진단을 받고 있는 5단지 등 2곳뿐이다.
8단지와 5단지가 속도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저층 위주로 지어져 사업성이 좋기 때문이다. 8단지는 최고 5층으로 용적률이 88%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용적률 100% 이하인 경우 사업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4년 조합설립인가를 받은 후 3년 만인 2017년 4월 관리처분인가를 받아 현재 철거 작업 중이다. 한화건설이 시공자로 선정돼 올 6월 중 일반 분양할 예정이다. 총 1062가구로 재건축한다.
5단지도 최고 5층 이하 저층 단지로 용적률도 94%로 낮다. 강화된 새 안전진단 기준 적용을 피했고, 올 5월쯤 나올 안전진단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상계동 일대 대부분 노후 아파트는 모두 중·고층이면서 용적률도 150~200%에 달한다. 전문가들은 용적률이 200% 안팎이면 재건축을 해도 사업성이 떨어진다고 평가한다. 이 때문에 상계동에는 아직 재건축이 본격 추진되는 단지가 거의 없다.
새로 강화된 안전진단 기준은 그렇지 않아도 사업 추진이 어려운 상계동 일대 아파트 재건축에 쐐기를 박았다. 새 안전진단 기준에서는 ‘주거환경’ 항목 배점을 40%에서 15%로 낮췄다. 상계 주공아파트처럼 주차장이 부족하고 배관 등이 낡은 정도로는 재건축 추진이 힘들게 된 것이다.
■“노원구가 죄 지었나”…주민들 망연자실
그러나 상계 주공아파트 단지의 주거 환경은 심각한 수준이다. 주차 공간이 없어 대부부 단지가 어린이 놀이터를 없애고 주차장으로 바꿨다. 노원구청 관계자는 “상계주공 아파트는 건설 당시 가구당 주차 대수를 1대 미만으로 설계했다”면서 “요즘 가구당 1~2대씩 차를 가지고 있으니 매일 주차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각종 배관도 낡아 집 수도관에서는 녹물이 수시로 나온다. 한 입주민은 “며칠 집을 비웠다가 수돗물을 틀면 녹물이 쏟아진다”고 했다.
정부도 이런 사정을 감안해 주차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거나 소방차 진입이 힘든 아파트는 ‘주거 환경 과락(科落·E등급)’을 통해 구조안전성 점수 등과 무관하게 재건축할 수 있도록 기준을 완화했다. 하지만 상계주공 아파트들은 재건축 사업성 자체가 사업 추진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획기적 개발 없이는 집값 상승 어려워
상계주공 아파트는 서울 강남 등 이른바 인기지역을 제외한 대부분 아파트 단지가 처한 현실을 보여 준다. 재건축 사업은 용적률을 최대한 높여 일반 분양 물량을 많이 만들어 팔아 얻은 돈으로 사업비를 조달하는 구조다. 하지만 같은 서울이라도 강북지역 중층 아파트 단지는 용적률이 200% 안팎이 많아 재건축 사업이 쉽지 않다. 결국 상계동에서도 용적률이 100% 안팎인 5·8단지 정도만 사업 추진이 가능한 것이다.
결국 상계동 주공아파트 일대 재건축이 활성화되려면 규제 완화보다 주거환경 개선 등으로 주택 수요가 늘어나 집값이 올라가는 것이 더 필요한 상황이다. 현재 서울시는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에 따라 약 2조원을 투입해 창동역~노원역 일대 환승센터와 공연시설 ‘서울아레나’를 짓고, 창동차량기지와 운전면허시험장 부지(25만㎡)를 지식형 첨단산업 거점으로 개발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이밖에 동부간선도로(창동·상계구간) 지하화(2026년)에 대한 적격성 조사가 진행 중이고, KTX 연장(의정부~수서) 사업과 GTX-C노선(의정부~금정) 예비타당성 조사도 이뤄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상계동 등 서울 외곽지역의 재건축 사업성은 해당 지역 주거 환경이 얼마나 개선되고, 수요가 늘어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본다. 함영진 부동산114리서치센터장은 “상계동은 자족 기능이 떨어지는 지역이어서 최근 추진되는 일자리 만들기 사업들이 판교신도시 만큼 효과적으로 진행돼 주택 수요가 더 늘어난다면 집값에도 변화가 따를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