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오후 5시쯤 서울지하철 3호선 종로3가역. 6번 출구로 나와 300m 정도 걸어가자, 기와를 얹은 낡은 한옥이 다닥다닥 모여있었다. 익선동 한옥마을이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함께 개발됐던 북촌 한옥마을이 부자동네라면 익선동은 서민들이 주로 살던 동네다. 한옥 크기도 대부분 전용면적 33㎡(10평) 남짓으로 북촌에 비해 작다.
달동네처럼 비좁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갔더니 전혀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현대적인 인테리어를 한 식당, 카페, 술집이 골목 곳곳에 숨어 있었다. 태국음식인 팟타이·망고스시를 파는 ‘살라댕방콕’, 프랑스 가정식인 로스티드 치킨·라따뚜이가 있는 ‘르블란서’ 등 SNS(소셜미디어)에서 유명한 식당 입구에는 손님들이 5~6m씩 줄을 서 있었다. 하지만 북적대는 가게 옆에는 셔터를 내리고 ‘임대’ 간판을 걸어 놓은 점포도 3~4곳 걸러 한곳씩 있었다.
그동안 익선동은 북촌이나 서촌에 비해 소외됐다. 그런데 최근 2~3년 낡은 한옥을 리모델링한 식당·카페가 줄줄이 들어서면서 20~30대 고객들이 즐겨찾는 ‘힙(hip·새롭고 개성있다는 의미)한’ 동네가 됐다. 북촌이나 서촌보다 이국적인 음식을 파는 곳이 더 많고, 동네를 찾는 고객층도 좀 더 젊다. 익선동 일대 한옥은 모두 119채로 적지만 대부분 오밀조밀 모여있어 밀집도가 높다.
익선동은 가로수길·홍대·경리단길 등 ‘뜨는’ 상권들의 공식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젊은 사업가들이 진출해 기존에 볼 수 없던 분위기를 가진 개성있는 가게를 열고, 페이스북과 블로그 등 SNS를 통해 홍보하면서 유행에 민감한 2030세대를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여기에 성공한 기존 상권들이 겪었던 문제점도 똑같다. 동네가 뜨면서 임대료가 급등하고 이로 인해 상권을 만들었던 기존 상인들이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50만원이던 월세 200만원으로…결국 밀려난 한식당
익선동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점 중 하나였던 ‘수련집’. 3500원(현재 4000원)이면 백반 한끼를 먹을 수 있어 직장인들이 즐겨 찾았다. 익선동 중심에 있던 이 식당은 지난해 초 후미진 골목 끝으로 옮겼다. 건물주가 50만원이던 월세를 200만원으로 4배로 올려달라고 요구해 이사했다. 수련집 자리엔 기업형 만두 가게가 문을 열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가로수길과 경리단길은 물론 청담동 등지에서도 문제가 됐어다. 익선동 임대료도 비슷하다. 현지 부동산 공인중개사사무소들에 따르면 2015년 보증금 2000만원에 3.3㎡(1평)당 6만~7만원 정도였던 익선동 일대 점포 월세는 2년 만인 지난해 평당10만원으로 거의 배 가까이 올랐다.
아직 북촌이나 서촌보다는 저렴한 편이다. 하지만 비싸기로 유명한 강남역(12만8040원)이나 신사역(13만680원) 턱밑까지 올랐다. 익선동의 부동산 중개업소 관계자는 “평당 10만원보다 더 높게 부르는 곳도 수두룩해 앞으로 더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임대료가 급등하면서 익선동 자영업자들과 세입자들은 발을 구르고 있다. 익선동에서 퓨전 한식당을 운영 중인 김모씨는 “급등한 임대료 때문에 익선동 상권을 일군 초기 멤버들은 하나 둘씩 빠져나가고 있다”고 했다. 난데없이 ‘불똥’을 맞은 경우도 있다. 한옥마을 외곽 셋방에는 노인과 외국인 근로자들이 월세로 사는 경우가 많은데, 이 집들의 월세도 오를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재개발 무산 후 한옥마을 지정돼 ‘귀한 몸’
익선동 한옥마을은 원래 2004년부터 기존 건물을 헐고 아파트를 짓는 재개발 사업이 추진됐던 지역이다. 익선동은 서울 4대문안에 있는 동네여서 시내 어디든 쉽게 도달할 수 있고, 지하철 1·3·5호선 종로3가역이 있는 등 교통여건도 좋다. 하지만 자영업자들에게 한옥 점포 몇 칸을 내어주고 월세를 받는 지주들의 반대로 사업은 13년째 겉돌았다.
서울시는 올해 1월 4일 익선동 일대를 재개발 구역에서 해제하고, ‘한옥밀집지역’으로 지정했다. 한옥밀집지역에선 5층(20m) 이하 건물만 지을 수 있고 프랜차이즈 점포도 입점할 수 없다.
재개발이 무산됐지만, 원형을 보존한 한옥이 많았던 덕에 지금은 서울의 옛모습을 간직한 지역으로 남게 됐고 상권도 형성되면서 ‘귀한 몸’이 됐다. 익선동 S공인중개사사무소 천모 대표는 “익선동 재개발이 자꾸 늦어지면서 사람들이 덩치크고 낡은 애물단지 한옥을 헐값에 팔고 떠났지만 지금은 얘기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한옥 시세는 2016년 3.3㎡당 3000만원 정도였는데, 현재 5000만원선으로 평당 2000만원 가까이 올랐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16년 8월 대지 185.1㎡ 단독주택이 19억3000만원에 매매 계약됐다. 3.3㎡당 약 3440만원이다. 지난해 11월에는 대지 92.6㎡ 단독주택이 13억8000만원에 팔려 3.3㎡당 4920만원으로 급등했다. 같은 기간 북촌의 대지 39.75㎡ 단독주택이 7억원으로 3.3㎡당 5818만원에 거래된 것보다는 저렴하지만 상승 추이를 감안하면 익선동 한옥 가격이 북촌과 비슷한 수준까지 오를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도 있다.
■임차인 떠나면 상권도 죽어
익선동 땅값이 상승하고, 상권이 형성된 것은 이 지역 토지·건물 소유자에게는 희소식이다. 하지만 상권 활성화로 인해 임대료가 급등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이어지면 세입자는 물론 토지·건물 소유자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서울시는 세입자들이 내몰리는 현상을 막기 위해 건물주와 임차인간 임대료를 일정 이상 올리지 않는 등 ‘상생 협약’을 맺도록 유도하겠다고 하지만, 이 역시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익선동의 한 카페 주인은 “이미 월세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급등한 상황에서 더 이상 임대료를 올리지 않겠다는 협약은 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익선동의 건물주와 임차인들이 장기적인 안목에서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권강수 한국창업부동산정보원 이사는 “임대료가 급등하는 것도 문제지만, 상권이 활성화되는데 건물주에게 임대료를 올리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측면도 있다”며 “건물주와 임차인이 합리적인 수준에서 임대료를 결정하고, 상권 활성화의 과실을 나눠 먹을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