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집고

"아들 앉은 의자에서 영감"…800만개 팔린 트립트랩

뉴스 정은미 상명대 겸임교수
입력 2017.10.20 06:31

인류 역사와 함께한 나무는 가구 재료로 나날이 주목받고 있다. 특유의 친근함과 자연스러움 때문이다. 목가구는 한 번 인연을 맺으면 다음 세대에 대물림할 만큼 정이 든다. 땅집고(realty.chosun.com)는 정은미 상명대 겸임교수와 함께 목가구가 우리 삶의 안식처로 자리잡기까지 거쳐온 기나긴 여정을 따라가 본다.

[정은미의 木가구 에피소드] ②자연과 예술, 일상에서 온 가구

찰스 앤 레이 임즈의 '라 셰즈(La Chaise)' 라운지 의자. / 비트라(Vitra)제공


가구는 디자이너들 머릿속에 순간 떠오르는 영감의 결과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과 자연을 세심히 관찰하고 이를 디자인에 접목시킨 노력의 산물이다. 또 일상에서 부딪히는 시행착오를 해결하려고 수없이 도전하며 실패를 거듭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가구에는 당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과 디자이너의 열정이 담겨 있다.

■가구에 녹아든 예술

1930년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후안 미로(Joan Miro) 같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작품과 후안 알프(Joan Arp)의 조각품은 가구 디자이너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이렇게 탄생한 가구들은 가는 선과 입체의 균형, 비대칭적이면서도 자유로운 형태를 특징으로 한다. 강철 파이프나 곡목으로 만들어졌던 2차원적 의자들은 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FRP: Fiber Glass Reinforced Polyester) 출현과 3차원 성형기술 도입으로 ‘조각 수준’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가구는 이제 하나의 몸체이자 다양한 비례를 구성할 수 있게 됐다.

후안 미로의 거울 앞의 여자(Woman in front of a mirror). 스페인 출신의 후안 미로는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존재하던 형상들인 선과 면 그리고 추상적 형태의 오브제를 밝고 강렬한 색채와 결합해 순수함과 환상을 담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www.1stdibs.com 제공


찰스 앤 레이 임즈의 ‘라 셰즈(La Chaise)’ 라운지 의자. 프랑스계 미국 조각가인 가스통 라셰즈(Gaston Lachaise)의 조각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 유기체와 같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비록 당시 생산되지 못하고 시작품으로 끝났지만 이 작품은 플라스틱을 사용한 조각적 가구의 대량생산을 예고했다. / 비트라(Vitra) 제공.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는 가구를 기능적인 조형물로 봤다. 1939년 그는 당시 뉴욕현대미술관 대표였던 A 컨거 굿이어(A Conger Goodyear)를 위해 나무로 만든 두 개의 조형물과 유리로 구성한 독특한 ‘IN -50 커피테이블’을 디자인했다. 동일한 형태의 조각을 반대 방향을 보도록 고정시킨 구조에서 간결한 조형미가 느껴진다.

조각품처럼 보이지만 생산 과정이 단순해 미국 모더니즘을 선도한 세계적 가구 회사 허먼 밀러사가 대량으로 판매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그의 가구 중 가장 유명한 디자인으로 평가받는다. 아르누보 이후 디자이너들에게는 자연의 유기적 형태와 산업 생산에서 요구되는 생산성 사이의 상충되는 측면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과제가 있었다. 이사무 노구치의 작품은 이 점을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이사무 노구치의 ‘IN-50 커피테이블’. / 비트라(Vitra) 제공


■자연이 만든 절제되고 세련된 곡선 패턴

자연은 늘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디자인 소재가 됐다. 자연의 다양한 매력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인간은 자연을 십분 활용하는 과정에서 가구를 탄생시켰다.

윌리엄 모리스 텍스타일 William Morris Textiles (Tulip and Willow). 윌리엄 모리스는 자연 모티프를 대담한 형식으로 단순화시켰다. /www.ipernity.com 제공


윌리엄 모리스 (William Morris)는 예술과 공예의 일체화를 추구한 아트 앤 크라프트(Arts and Crafts) 운동을 이끌던 19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디자이너였다. 그는 자연 모티프를 절제되고 아름다운 곡선의 세련된 패턴으로 만들어냈다. 이는 과거의 역사주의에서 탈피하고 새로운 생산기술에 맞는 구조와 장식을 표현하고자 했던 아르누보의 가구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줬다. 프랑스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에밀갈레(Emile Gallé)를 중심으로 한 낭시(Nancy)학파는 전통적인 프랑스 가구의 뼈대 위에 정형화된 꽃이나 나뭇가지 모티프의 유기적인 선을 다양한 기법으로 담았다.

에밀갈레(Emile Galle)의 셰즈 옴벨레(Chaise Ombelles). 전통적인 프랑스 가구구조에 정형화된 꽃모티프와 나뭇가지의 유기적인 선을 담아낸 에밀갈레의 옴벨레 의자다. /에콜드낭시 뮤지엄제공ⓒMusee de l'Ecole de Nancy, Photography by C. Philippot


로난&에완 부훌렉의 '베제탈체어(Vegetal Chair)'. 프랑스의 부훌렉 형제는 나뭇가지가 자라나 의자가 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6가지 색상으로 생산됐다. 플라스틱 재료를 자연물로 표현하며 멀어진 자연과의 관계를 환기시켰다. / 비트라(Vitra) 제공


디자이너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소재로 우리의 눈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연이 늘 우리 곁에 있음을 알리는 메신저 역할을 하기도 한다.

디자인의 모티프가 된 펠리칸(Pelican).


핀율의 펠리칸(Pelican)체어. 날개를 뻗은 펠리칸을 모티프로 하여 유기적인 조각작품의 형상으로 완성했다. / www.finnjuhl.com 제공


정은미의 '안식(In Repose)'. 바람 따라 유영하듯 흘러가던 나뭇잎이 돌 위에 사뿐히 내려 앉은 이미지에서 디자인 모티프를 얻었으며, 나뭇잎과 돌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통해 마음의 평온을 되찾은 듯 편안한 휴식을 느낄 수 있는 벤치다. /한국도자재단 제공 ⓒPhotography by Mogi Studio


■일상이 묻어난 의자

가구는 실생활에서 인체와 접촉해 사용하기 때문에 디자이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행동이나 습관을 유심히 관찰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기능을 만들어 낸다. 대표적인 디자이너가 피터 옵스빅(Peter Opsvik)이다. 그는 사람들이 앉는 습관을 통해 보여주는 다양한 자세와 행동을 관찰해 인체공학적으로 뛰어난 ‘트립 트랩’, ‘그래비티 밸런스’, ‘베리어블 밸런스’ 등의 가구를 디자인했다. 1972년 출시된 트립 트랩은 그의 이러한 디자인 철학을 대표하는 것이다.

피터옵스빅의 ‘트립트랩 의자. /스토케 코리아 제공


이 디자인은 그의 아들이 어른 신체 사이즈에 맞춰 디자인한 의자에 불편하게 앉은 모습을 발견한 데서 출발했다. 의자의 높이는 그대로 두고 좌판과 발받침대 조절만으로 발을 지탱한다. 자유로운 움직임에도 안정감 있고 편안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 너도밤나무에 오일로 마감해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자연스럽고 친근함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아이들 성장에 따라 좌판과 발받침 간격을 조절해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사용할 수 있다. 이 의자는 전 세계적으로 800만개가 팔리며 스테디셀러가 됐다.

정은미 상명대 겸임교수

정은미 상명대 겸임교수는 상명대에서 목공예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이탈리아 밀라노 도무스아카데미 대학원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목조형 작품인 얼레빗 벤치 ‘여인의 향기’가 중학교 미술교과서에 수록됐다. ‘정은미의 목조형 가구여행기’와 ‘나무로 쓰는 가구이야기’를 출간했다. 현재 리빙오브제(LIVING OBJET) 대표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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