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태동한 한국 근대 건설 산업이 올해 70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건설 산업에 대해서는 긍정보다는 부정, 발전보다는 쇠락하는 이미지가 더 강한 게 현실이다. 조선일보 땅집고(realty.chosun.com)는 한국건설산업연구원과 공동으로 지금까지 인류 문명과 과학 발전에 기여한 기념비적 건축·구조물들을 발굴, 그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해 건설산업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기획물을 연재한다.
[세상을 뒤흔든 랜드마크] 2000년간 쌓아올린 지구 최대의 인공 구조물
2007년 7월 7일 오후 7시, 세계 신(新) 7대 불가사의가 세상에 공표됐다. 새 7대 불가사의는 기존 7대 불가사의에서 하나의 건축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체됐다. 유일한 건축물이 바로 중국 만리장성이다. 만리장성은 보하이만 산하이관에서 실크로드 동쪽 끝 타클라마칸사막의 자위관(감숙성 소재)까지 길이가 6700km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구조물이다. 이는 서울~부산 간 거리(450km)의 15배 정도이다.
만리장성은 중국 춘추시대 (BC 770〜BC 476)부터 명나라(AD 1368〜AD 1644)까지 끊이지 않고 인간의 손길이 닿은 지구상 최대 인공 구조물이다. 그래서 만리장성을 중국 역사의 숨결을 전해주는 야외 박물관이라고 칭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만리장성은 현대 중국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고 있다.
■2000여 년에 걸쳐 쌓아올려
만리장성의 기원은 춘추시대 제(齊)에서 시작돼 전국시대 연(燕), 조(趙), 위(魏), 초(楚) 등 여러 나라가 장성을 구축했다. 진시황이 통일 이후 연, 조 등이 북변(北邊)에 구축했던 성을 증·개축해 감숙성 남부 민현에서 랴오둥의 랴오양에 이르는 장성을 구축함으로써 흉노에 대한 방어선을 만들었다. 한나라에 이르러 영토 서쪽 끝인 둔황 바깥쪽 위먼관까지 장성이 연장됐다.
북방 이민족이 중원을 지배했던 시기와 만리장성의 바깥 북쪽까지 영토를 확장한 당나라 시절에는 만리장성을 거의 방치한 상태였다.
만리장성이 산하이관에서 자위관에 이르는 현재 규모를 갖춘 것은 한족 왕조인 명나라 때이다. 명나라는 만리장성 지대를 9개의 군관구로 나누어 구변진(九邊鎭)을 두고 장성을 통과하는 교통 요지, 즉 옌먼관, 쥐융관, 구베이커우, 장자커우 등지에 견고한 관성을 설치했다. 청대 이후에는 군사적 의미를 상실하고 단지 중국 본토와 만주, 몽골을 나누는 정치·행정적인 경계선에 불과하게 됐다.
■“만리장성은 완벽한 군사 요새”
만리장성은 크게 관(關), 봉화대, 성벽으로 나뉜다. 관은 방어가 용이한 군사 요충지에 설치한 대형 교두부로 설계했고, 도시 성곽 둘레를 판 못인 해자 등과 같은 다양하고 효과적인 방어 시설을 함께 갖추고 있다. 봉화대는 적의 침입과 동향을 전달하는 가장 오래되고 효과적인 통신 시스템인데, 주로 산이나 언덕 꼭대기에 있다. 성벽은 만리장성의 가장 주요한 시설이다. 성벽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벽체 높이는 8.1m다. 벽체의 단면은 사다리꼴 형상으로 밑변이 6.5m, 윗변이 5.8m이다. 군사 요충지나 평지에는 높게 축성하고, 군사적 중요성이 떨어지는 지역이나 산악지대는 상대적으로 낮게 쌓았다.
만리장성은 전쟁을 수행하기에 완벽한 군사 시설로 설계돼 있다. 총안(銃眼)은 2m 정도 높이의 요철형 벽체이고, 적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적을 향해 활이나 총을 발사하는 동시에 자기 몸을 보호하는 엄폐물 기능을 제공한다. 벽체로부터 안쪽 1m 정도에 설치된 낮은 벽체는 여자도 쉽게 넘을 수 있다고 해서 여장(女墻)으로 불리었고, 병사와 말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구조물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한 돈대(墩臺)는 일반적으로 2층 구조인데, 위층은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고, 아래층은 병사들의 식량과 말의 사료, 장비와 화약 등을 보관하는 창고 겸 무기고로 설계됐다. 성문에는 5〜6m 폭의 30도 정도 경사진 마도(馬道)가 설치돼 적은 병사를 가지고 많은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한다. 만리장성에는 빗물을 즉시 배출하는 배수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침수로 인해 성벽이 파손되는 것을 예방하고 있다.
■다짐 토벽, 찹쌀 풀로 벽돌 쌓기
만리장성은 그 지역에서 얻기 쉬운 자재를 사용하고 당대 기술력에 가장 적합한 시공 방법을 채택했다. 근세로 내려오면서 총이나 대포 등 무기의 파괴력이 커지면서 이를 견뎌낼수 있는 돌과 같이 강도가 큰 성벽 자재가 사용됐다. 성벽은 사용되는 자재 종류에 따라 흙을 드롭 해머로 이용해 다져서 만드는 다짐 토벽, 벽돌을 사용한 벽돌 성벽, 돌을 사용한 석(石) 성벽 등으로 구분된다.
다짐 토벽은 수나라 시대 이전에 축성된 만리장성에 사용된 공법이다. 이는 성 벽체 모양의 나무 거푸집을 짜고, 흙을 채워 다져서 정해진 벽체의 높이와 길이가 될 때까지 여러 층의 다짐 흙체를 연속적으로 시공하는 방식이다. 흙이 없는 사막 지대에서는 흙 대신 바위 부스러기와 버드나무 가지를 섞어서 벽체를 만들었다. 토벽은 시공이 간편한 반면에 시간이 지나가면서 쉽게 붕괴되거나 파괴된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벽돌로 만리장성을 쌓는 것이 보편화된 것은 벽돌 생산 기술이 발달한 당나라 이후이다. 그 당시 벽돌이 비싼 자재였기 때문에 큰 도시의 성문이나 이에 인접한 성벽의 벽체 재료로서 일부만 사용됐다. 이런 벽돌 성벽도 벽돌을 외벽 자재로 썼고, 전통적인 축성 자재인 흙을 내벽 채움재로 이용했다. 명나라 시대에 와서 벽돌 생산 기술이 한 단계 더 높아지면서, 고품질 벽돌이 성벽 자재로 광범위하게 쓰이게 됐다. 찹쌀과 차조로 풀을 쑤어 혼합한 회반죽으로 벽돌을 하나씩 붙이는 축성 공법은 벽돌이 깨지면 깨졌지 뗄 수가 없었다. 이런 공법은 당시 새롭게 보급된 화약 무기 공격에 매우 효과적인 방어 수단이었다. 또한, 만리장성의 성벽이 현재까지 거의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된 것은 이러한 효과적인 공법의 덕택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산악 지대의 성벽은 주변의 돌을 이용했다. 성벽 자재는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가공한다. 이 때에도 접착제는 찹쌀 풀을 혼합한 회반죽을 이용했는데, 이는 자연적인 풍화 작용뿐 아니라 당대 최고 무기 공격에도 견뎌내는 매우 효과적인 건설 자재이다. 베이징 근교에 있는 바다링(八達嶺) 구간의 만리장성 성벽을 보면서 우리는 공법의 우수성을 오늘날에도 재확인할수 있다.
■군인, 민간인, 죄수가 동원된 건설
고대에는 인력에 의존한 건설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만리장성 건설에 동원된 건설 인력은 군인이 주력이었지만, 민간인과 죄수도 있었다. 중국 역사서인 「사기(史記)」에 의하면, 진나라 장수 몽염이 흉노족을 정복한 후 진시황은 몽염에게 명령해 만리장성을 재축성하도록 했다. 이 일에 30만명의 병사가 동원됐고 9년이 걸렸다. 북주(北周) 시대에는 180만명의 건설 인력이 투입돼 만리장성을 축성했는데, 대부분 징집된 민간인이었다. 또 다른 사례로는 수나라가 내몽고 지역의 만리장성을 축성하는 데에 100만명을 투입했다. 진나라의 경우에는 30만명의 군인 외에 50만명의 민간인을 만리장성 건설에 징발했다. 당시 법에 의하면, 죄수는 4년 동안 강제 노역하도록 했는데, 이 규정을 잘 활용해 죄수들을 만리장성 현장에 투입했다.
■20% 정도만 온전히 남은 중국 최고 관광자원
베이징 근교 바다링 제6루를 지나 해발 888m 지점에 ‘만리장성에 오르지 않은 이는 진짜 사나이가 아니다(不到長城非好漢)’라고 마오쩌둥이 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중국 통계에 의하면 매년 1000만명 정도의 관광객이 만리장성을 찾는다. 1987년 유네스코가 선정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만리장성은 중국 제일의 관광 자원이 됐다.
하지만 만리장성이 2000년에 걸친 자연 재해와 훼손으로 ‘천리장성(千里長城)’으로 전락했다는 중국 관련 학회 발표가 있다. 해당 학회는 총 6700km 중 온전히 남은 성벽은 20% 정도인 1200km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학회는 최근 이루어지는 인위적인 파손과 개발이 더 큰 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보존의 긴급성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