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서울 강남권 재건축 아파트 수주를 위한 '과열 경쟁'에 제동을 걸겠다고 발표했지만, 건설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내년 1월부터 시행되는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 부담금을 건설사가 대납(代納)하겠다는 제안까지 나와 정부가 위법성 조사에 나섰다. 향응 제공과 금품 살포 같은 '구태(舊態)'까지 등장해 재건축·재개발 사업 관련 비리를 막기 위한 '공공관리제도'가 시행이 무색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호텔 코스요리에 돈 봉투까지 등장
27일 시공사 선정 총회를 여는 서초구 반포동 '반포주공1단지'에서는 현대건설과 GS건설의 상호 비방과 '선심 경쟁'이 극에 달했다. 추석을 앞둔 25일엔 가구마다 수십만원대 고급 굴비세트가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21일 "반포주공1단지 시공권 수주를 위해 과도한 이사비를 제공하겠다는 건설사에 시정 조치를 내렸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같은 날 현대건설은 "가구당 7000만원의 이사비는 어떤 식으로든 드리겠다"고 발표했고, 다음 날 아파트 단지 곳곳에 '시공사에 선정되면 이사비 전액을 조합에 예치하겠다'는 현대건설 측 전단이 뿌려졌다. 경쟁사인 GS건설은 서울 서초구의 한 고급호텔에서 수차례 조합원 상대 설명회를 열고, 고급 요리와 선물까지 제공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지난 22일 서울 중구의 한 특급호텔 연회장에서 열린 롯데건설의 사업설명회에 서초구 잠원동 '한신 4지구' 재건축 조합원 수십명이 참가했다. 조합원에게 송이버섯 수프, 바닷가재 등 코스 요리와 고급 주방용품이 선물로 제공됐다. 롯데건설은 이 자리에서 "올해 안에 관리처분인가를 접수하지 못해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를 피하지 못하면 가구당 2000만원씩 총 579억원의 부담금을 대납하겠다"며 "초과이익환수제를 피하면 같은 금액을 공사비나 이주촉진비로 지급하겠다"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 달 11일 시공사 선정을 앞둔 서울 송파구 신천동 '미성·크로바 아파트' 재건축 사업장에선 일부 건설사가 조합원에게 돈 봉투를 뿌린 정황이 포착됐다. 이 아파트 조합원은 "어느 건설사 과장이 명함과 함께 5만원권 지폐 20장이 든 봉투를 건넸다"면서 "조합에다가 바로 신고했지만,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국토부, 재건축 현장 점검단 파견
각종 의혹이 터져 나오자 국토부와 서울시, 해당 지자체는 25일 강남권 재건축 아파트 단지에 '현장 점검단'을 파견했다. 국토부는 일부 건설사가 제안한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액 보전' 조건에 대해서도 법률 자문을 통해 위법성을 검토하기로 했다.
국토부는 "건설사가 제공하는 금품이나 향응을 받거나 추후에 받겠다는 의사를 승낙한 사람도 처벌 대상"이라고 밝혔다.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에 따르면, 시공사로 선정되려는 건설사에서 금품을 받거나 나중에 이득을 받기로 약속한 조합원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릴 수 있다.
◇아파트로 손쉽게 돈 벌 궁리만
이처럼 재건축 수주 경쟁이 '진흙탕 싸움'으로 번진 것은 아파트 공사를 '확실한 돈줄'로 보기 때문이다. 해외사업이 신통치 않은 대형 건설사들이 아파트 공급에만 치중하면서 전체 매출에서 국내 주택·건축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건설업계 '맏형'으로 통하는 현대건설은 2년 전인 2015년만 해도 전체 매출액에서 국내 건축·주택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22.8%에 불과했고, 해외 플랜트·전력 부문 비중이 38.9%로 가장 높았다. 그러나 올해 상반기 매출에선 국내 건축·주택 비중은 41.6%로 급등했고, 해외 플랜트·전력 매출은 29.7%로 떨어졌다. GS건설은 2015년 20.3%였던 국내 주택·건축 매출 비중이 지난해 33.4%로 늘더니 올 상반기엔 45.8%로 치솟았다.
전문가들은 국내 건설사들이 해외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손쉽게 현금을 벌어들이는 아파트 사업에만 집중하다가 낭패를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 대형 건설사 임원은 "국내 주택시장이 침체기에 접어들면 아파트에 '올인'하는 사업방식이 독(毒)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