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집고

5차례 폐쇄로 유럽을 공포에 떨게한 192km 인공물길

뉴스 이영환 건설산업硏 본부장
입력 2017.08.20 06:35

1947년 태동한 한국 근대 건설 산업이 올해 70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건설 산업에 대해서는 긍정보다는 부정, 발전보다는 쇠락하는 이미지가 더 강한 게 현실이다. 땅집고(realty.chosun.com)는 한국건설산업연구원과 공동으로 지금까지 인류 문명과 과학 발전에 기여한 기념비적 건축·구조물들을 발굴, 그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해 건설산업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기획물을 연재한다.

[세상을 뒤흔든 랜드마크] 세계 해양 물류의 ‘혁명’을 일으킨 운하

수에즈운하 다리를 지나고 있는 화물선. 이 다리는 이집트-일본 우정의 다리라고도 불린다.


수에즈운하(총 길이 192㎞)는 16세기부터 현재까지 유럽과 아시아의 무역로를 지배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운하 개통 이전에는 세계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한 국가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됐고, 개통 이후에는 유럽 국가의 부(富)를 창출해 주는 아시아 무역로의 중추(中樞) 역할을 담당했다.

수에즈운하 개통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을 경유하던 런던~싱가포르 간 항로는 기존의 2만4500㎞에서 1만 5027㎞로 약 1만㎞(약 40%)가 단축됐다. 이는 가히 물류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를 입증하듯 1869년 개통 이후 10년 간 통과한 선박 총톤수가 10배쯤 늘었다. 현재 세계 해상 무역량의 7.5%가 이 운하를 통해 이동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아라비아만 연안의 유전 개발 이후에는 석유와 석유 제품이 통과 화물로 등장해 1950년대에는 통과 화물 총 톤수의 60%를, 1960년대에는 70%를 차지했다. 1956년 수에즈전쟁으로 인해 운하가 폐쇄된 이래 지금까지 다섯차례 운하가 폐쇄됐다. 이에 따른 유럽 국가가 입은 경제적 손실과 혼란은 가공할 만했다. 특히 제3차 중동전쟁이 터진 1967년부터 8년 동안 운하 폐쇄는 대형 석유 유조선을 비롯한 화물선 대형화의 직접적 요인이 됐다.

이렇듯 인류가 건설한 구조물이 오랜 시간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한 사례을 손꼽으라고 하면 그 첫째가 수에즈운하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수에즈운하의 역사

수에즈 지협(地峽)에 운하를 파서 지중해와 홍해의 바닷길을 잇겠다는 착상(着想)은 고대부터 시작됐다. 람세스2세의 재위 기간인 기원전 13세기경 고대 이집트 파라오의 명령에 의해 나일강과 홍해를 잇는 운하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기록에 남아 있다. 그리스 역사학자 헤르도투스는 네코2세가 나일강과 대염호수(Great Bitter Lakes)를 연결하고, 대염호수와 홍해를 잇는 공사를 기원전 609년 착수했지만 완성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결국, 기원전 500년경 페르시아 정복자인 다리우스1세가 이를 완공시켰다. 이후 수차례 개수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이 운하는 아랍상인이 이집트 농산물을 실어 나르는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다가 8세기경 회교 국가의 내분으로 인해 통행이 중단됐다.

기존 수에즈운하 노선과 그 옆에 일부 물길을 새로 내고 확장한 제2수에즈운하(왼쪽). 오른쪽은 수에즈운하를 찍은 인공위성 사진.


16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세계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해상 무역에 대항하기 위해 베니스의 상인들은 수에즈 지협에 운하를 건설하는 구상을 원로회에 제안했다. 하지만 막대한 사업비 때문에 이를 실행하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 시기(1798~99년), 영국의 인도 무역에 타격을 주기 위한 방책으로 운하 건설을 검토했다. 이 또한 홍해의 해수면이 지중해보다 10m 더 높은 것으로 계산되어 갑문이 없는 운하가 불가능하다고 결론짓고 포기했다. 하지만 이는 측량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됐다. 이런 계획들이 폐기된 이후에도 수에즈 지협에 운하를 건설하겠다는 제안은 유럽의 여러 국가에 의해서 계속 시도됐지만 기존 무역 질서를 유지하려는 영국의 강력한 반대와 이집트 총독의 정치적인 이해 관계로 번번이 거절됐다.

■프로젝트 파이낸싱 방식으로 추진

프랑스 외교관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Ferdinand de Lesseps)가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를 자신이 직접 건설해보겠다는 꿈을 꾼 것은 그의 30대 시절이었다. 마침내 1854년 레셉스는 마호메드 사이드 파샤(Mohammed Said Pasha) 이집트 총독으로부터 운하 건설 및 개통 후 99년 간 운영권과 수에즈 지협 조차권을 얻어냈다. 1856년에는 이집트의 종주국인 터키가 이를 승인했다. 수에즈운하 건설과 운영을 담당할 회사(SPC)가 2억 프랑(40만주)의 자산 규모로 1858년 12월 15일 설립됐다. 이로써 30년 간 품었던 꿈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수에즈운하 개통 초기 모습.


영국은 새롭게 건설될 운하가 자국의 아시아 무역 장악을 약화시킬 것을 우려해 기획 단계부터 강력한 반대 의사를 보였다. 이런 국제 정세를 고려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레셉스는 다수 국가의 소액 개인 투자자가 최대한 많이 참여하는 운하 건설사업 재원 조달 방식을 원했다. 전례없는 성공적인 주식 공모 결과, 2만 1229명의 프랑스인이 20만 7111주를 매입했다. 이집트 총독의 개인 매입을 포함한 터키(오스만투르크)가 9만6517주를, 기타 유럽 제국에서 10만 866주를 사들였다. 나머지 8만 5506주는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 미국의 몫으로 배정했지만 팔리지 않아 나중에 파샤 총독이 전량 매입했다.

■난산 끝에 탄생한 수에즈운하

1859년 4월부터 고대의 운하를 개수해 수송로를 확보하는 것을 추진하면서 건설 공사가 시작됐다. 영국은 수만명의 이집트인들이 강제 노동에 동원됐다는 점과 6만㏊에 달하는 농경지 조차(租借)를 이유로 이집트 총독에게 항의했다. 이로 인해 공사가 일시 중단됐다. 이집트 노무 인력 공급이 원활치 못한 문제점을 타개하기 위해 35마력의 증기기관 버킷 준설기 60대를 비롯해 공사 특성에 맞게 고안된 다양한 기계 장비가 운하 공사에 투입됐다. 이런 준설 공사의 기계화 시공은 이후 운하 및 하천 공사에 적용돼 획기적인 기술 발전을 가져왔다.

이란의 군함 한척이 수에즈운하를 지나고 있다. 수에즈운하는 웬만한 대형 화물선은 물론이고 항공모함도 통과가 가능하다.


영국은 운하 건설 기간 내내 강렬한 반대를 했고, 이에 레셉스는 영국이 수에즈운하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될 것이라고 계속 설득했다. 이런 와중에 인도에서는 세포이항쟁(1857~59년)이 터지고 극동아시아에서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이 본격화됐다. 영국은 케이프타운을 돌아서 이 지역으로 가는 기존 항로보다 신속하게 자국 군대를 이동시킬 수 있는 빠른 뱃길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격렬한 반대의 선봉장이었던 팔머스톤 영국 수상이 1865년 사망하자, 모든 난관이 해소되고 영국도 운하 건설에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착공 후 10년이 지난 1869년 8월 15일, 지중해의 물이 염호수(the Bitter Lakes)들을 거쳐 홍해로 흘러들어가면서 수에즈운하가 완성됨을 인류에게 알렸다. 수에즈운하는 수심 8m인 164㎞의 수로, 3개의 도시(수에즈·이스마일리아·포트사이드), 2개의 항만(수에즈·포트사이드), 수백만㏊의 간척지 등을 이 세상에 선사했다. 이 사업에는 4억3000만 프랑의 경비가 들었는데, 이는 초기 사업비의 2배 이상이었다.

개통식은 유럽 각국에서 온 축하 사절단이 참석한 가운데 1869년 11월 16일 거행됐다. 그 유명한 오페라 ‘아이다(Aida)’는 수에즈운하 개통을 기념해 당시 파샤 이집트 총독의 요청으로 베르디가 만든 작품인데, 1871년 12월 24일 카이로 오페라극장에서 상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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