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집고

"300m 높이 가로등 기둥"이란 혹평 딛고 일군 철의 혁명

뉴스 신승우 이화여대 박사
입력 2017.07.02 06:40

1947년 태동한 한국 근대 건설 산업이 올해 70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건설 산업에 대해서는 긍정보다는 부정, 발전보다는 쇠락하는 이미지가 더 강한 게 현실이다. 땅집고(realty.chosun.com)는 한국건설산업연구원과 공동으로 지금까지 인류 문명과 과학 발전에 기여한 기념비적 건축·구조물들을 발굴, 그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해 건설산업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기획물을 연재한다.

[세상을 뒤흔든 랜드마크] 고정 관념에 도전한 ‘鐵의 혁명’

혁명이란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트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이다. 1899년 5월 프랑스 파리의 샹 드 마르에 공학기술자의 신념에 의해 우아한 자태의 ‘혁명’이 세워진다. 바로 에펠탑이다.

혁명의 시작은 이랬다.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거행하고 전쟁 패배 이후 다시 강력해진 프랑스를 과시하고자 했던 제3공화국 정부는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맞춰 상징적 건축물을 짓기로 결정했다. 박람회의 목표는 ‘화해, 재건, 제국의 우월성’이었다.

정부는 기념물 설계 공모전을 공고했고, 16일 간 접수된 600여 개의 설계안 중 샹 드 마르에 300 m 높이의 철제 구조탑 건설을 제안한 알렉상드르 구스타프 에펠의 계획을 채택했다. 에펠은 이미 ‘자유의 여신상’ 공동 작업 등에서 가볍고 우아하고 극도로 강한 철 구조물을 설계하고 건설하는 능력을 입증했다.

1899년 프랑스 파리에 세워진 에펠탑은 고전에 대한 혁명적 도전으로 평가된다.


■예술과 기술의 아트, 시대의 전환점 이뤄

그렇다면 왜 혁명인가. 100년 넘게 세기의 예술 작품으로 칭송받는 에펠탑은 사실 ‘스캔들’의 장본인으로 착공 전부터 새로운 재료 도입과 시공상 위험, 재정 문제 등 여러 난관을 헤쳐야 일어설 수 있었다.

첫째 난관은 철의 도입이었다. 건축 재료로 철을 사용하는 것은 당시 보편적으로 행해지던 방법이 아니었다. 당시 철은 전통적인 석조 외관이 갖는 고전적인 아름다움과는 본질적으로 조화될 수 없는 공격적인 재료로 무미건조하고 저속해서 수단은 될지언정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샤를 구노, 기 드 모파상, 알렉상드르 뒤마2세 등과 같은 예술가들은 1887년 에펠탑에 대해 “진짜 비극적인 가로등 기둥” 혹은 “프랑스의 예술과 역사를 위협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오늘날 에펠탑은 프랑스 예술과 역사를 밝혀주는 선봉이다. 무슨 조화였을까. 탑의 완공 자체가 해답이다. 탑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사물의 비례와 크기의 상황이 아득해진다.

에펠탑은 시대의 전환점을 이루었다. 대형 구조물이 목재와 석조에서 철강으로 옮겨진 것은 건축 분야에서 중대한 변화였다. 처음에는 교량에서 시작해 수정궁과 같은 철골 건물로 이어졌다. 그러한 경향은 에펠탑, 철도역까지 지속됐고 이후 철골과 철근 콘크리트가 대다수 세계 고층 빌딩에 적용됐다. 이런 변화는 나무와 돌이 본질적으로 건물 재료인 반면 철강은 건축용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에펠은 600여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에펠탑 최종 설계작으로 선정됐다.

새로운 재료 도입이라는 혁명적인 진보는 탑의 설계와 시공, 그리고 프로젝트 추진 과정까지 이어진다. 4개의 거대한 다리가 곡선으로 된 것은 미적(美的)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에펠과 처음 탑에 대한 아이디어 제공자인 토목공학자 쾨클랭이 철로 된 가장 작은 부품에 대한 압력까지 계산한 결과 설계를 그렇게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계산에 의한 설계는 고상한 전통주의자들을 격분시켰다. 그들이 보기엔 전적으로 기계적이고 상업적인 것에 밀려 미학의 절대적인 역할이 보조적인 것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예술 작품의 동기가 높이라면 무엇이 문제가 될까. 단지 과학적인 설계의 결과물일 뿐만 아니라 그 거대함에는 고유의 매력과 흡인력이 있다. 당시 인간이 세운 가장 높은 탑, 에펠탑을 가리킬 때 가장 적합한 표현은 바로 예술과 기술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아트(art)’라는 단어일 것이다.

■모든 부품의 조립화…시공 1년만에 흑자

이 예술 작품이 보유한 수량적인 위대함도 놀랍다. 에펠탑 시공을 위해 700장의 기술 도안과 3999장의 공장 도안이 만들어졌다. 40명의 도안가와 계산가들이 2년 간 이 일에 매달렸다. 모든 부분들은 0.01㎝까지 정확하게 계산했다. 탑은 1만 8000개의 조립 부품들로 구성됐는데 그 중 가장 무거운 것들은 3t이나 됐다. 250만 개의 리벳 못이 부분들을 서로 결합시켰다. 탑 건설에 7300t의 철이 들어갔고, 철에 칠할 60t의 도료가 필요했다.

공사 중인 에펠탑. 탑 건설에 7300t의 철이 들어갔고,부품만 1만8000여개가 사용됐다.


이 수량적인 위대함은 오히려 단순화를 꾀할 필요성을 제공했다. 즉, 시공 과정의 진보를 가져왔다. 모든 개별 부위와 연결 부위가 그림으로 묘사됐고 리벳 구멍의 위치와 크기 및 내구성까지 계산했다. 규격 생산울 해 쉽게 조립하기 위해서였다. 이 때문에 공사 정확도는 매우 높았다. 2만 개에 가까운 조립 부품들은 사전 제작됐고 소형 크레인을 사용해 새로운 공사 체계가 자리잡게 했다. 고도의 전문 장비 없이도 복잡한 구조물을 건설할 수 있는 있는 설계와 건설 방법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미 마리아 피아교와 가라비교의 섬세하고 우수한 포물선 아치로 공학계와 예술계를 놀라게 했던 에펠은 양쪽 사회에 세계에서 가장 큰 구조물이자 놀라운 예술 작품을 선사했다. 겉보기엔 양립할 수 없는 예술과 산업을 결합시키고자 애쓴 에펠의 대담함과 진취적인 태도는 탑 건설 프로젝트 추진과 관리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에펠은 공학 기술자였지만 기업가이자 사업관리자였다. 협력자인 토목공학자 쾨클랭과 누기에는 탑의 아이디어를 가졌지만, 에펠은 그것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경험과 재정적 수단, 관계,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에펠탑 건설 착수 전에 이미 300m 이상 올라가는 높이의 금속 받침 기둥과 금속 탑문을 세울 수 있는 새로운 기술에 대한 특허를 낸 상태였다.

탑 프로젝트의 진행에는 난관이 많았다. 수많은 기술자들은 삼각 철 구조와 토대가 외부의 힘을 견디지 못해 뒤틀려서 탑이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 지역 주민들은 탑이 자기 집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국가와 도시에 소송을 제기했다. 에펠은 직접 비용을 대고 위험을 감수한다는 조건으로 공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에펠은 스스로 공사 비용을 조달해야 했고 국가는 단지 150만 프랑의 보조금만 지불했다. 그 대신 향후 20년 간 단독 사용권을 얻었다. 국가의 보조금으로는 650만 프랑에 달했던 경비의 4분의 1 정도만 해결할 수 있었다.

이처럼 재정적인 난관이 있었지만 에펠탑은 투자할 만한 사업이었다. 만국박람회 중에만 이미 200만명의 방문객이 찾았고, 이후로도 관람객들이 쇄도해 완공 1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이익은 총 650만 프랑이었는데, 건축비에 100만 프랑 모자라는 액수였다. 행정가들의 최초 예상과 반대로 에펠은 모든 경비를 되찾았고 이후에도 수익은 계속 발생했다. 계약 당시 탑의 이미지와 관련된 판매 수익에 대해 이미 고려했다는 것은 사업관리자로서의 그의 능력을 보여준다.

2013년 에펠탑 부근에서 펼쳐진 프랑스 혁명기념일 불꽃쇼.


■공학 기술자의 신념이 세운 ‘우아한 고전’

역사상 어떠한 건물도 에펠탑만큼 국제적 인정이나 지위를 성취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물론 국가적 특성을 불러일으키는 건물과 구조물들이 많이 있긴 하다. 그러나 포스철도교 정도를 제외하고는 순수한 공학 작품은 분명 없으며, 그 건물을 세운 사람의 이름이 독특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또한 없다.

처음부터 에펠탑은 단순한 탑이 아닌 건물의 모든 구성, 즉 방과 사무실, 엘리베이터, 상점, 영화관 등을 갖추었고 지금도 매일 업무상 또는 관광차 에펠탑을 방문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아마 에펠탑이 세워지지 못했다면 지금의 파리를 상상할 수 없다. 에펠탑의 건설은 고전 우위에 대한 도전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 오늘날의 에펠탑은 그 자체가 우아한 고전이 됐다.

게다가 건설을 반대하던 철학가, 예술가들에게 은유와 의미의 풍부한 원천이 돼 주었다.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 건설 프로젝트 자체가 혁명이었고 이것은 공학 기술자의 기술력, 사업관리자의 진취적인 태도가 바탕이 됐다.

관련기사를 더 보시려면?

화제의 뉴스

"2000억원 토지 누락하고 방치"...압구정 3구역 조합장 해임추진 총회 연다
"얼죽신 가고 구축시대 온다" 2006년 입주 도곡렉슬 '평당 1억' 돌파...국평 34.5억 신고가 경신
"쌍령지구 민간임대는 사기분양"…토지주 130명 "사업 즉각 중단해라"
거실창 '옆집뷰' 리스크에 고분양가 논란까지ㅣ전주 마루힐 센트럴
송도 자이더스타에 흑백요리사 '만찢남' 셰프 등장한 이유?

오늘의 땅집GO

"3000만원 내면 임대아파트 준다?"…사기논란 휩싸인 쌍령지구
28년 방치한 김해 병원부지 아파트로 돌연 용도변경,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