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집고

하늘에서 보면 열쇠처럼 생긴 가톨릭의 보물

뉴스 박철한 건설산업硏 부연구위원
입력 2017.06.04 04:30

1947년 태동한 한국 근대 건설 산업이 올해 70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건설 산업에 대해서는 긍정보다는 부정, 발전보다는 쇠락하는 이미지가 더 강한 게 현실이다. 땅집고(realty.chosun.com)는 한국건설산업연구원과 공동으로 지금까지 인류 문명과 과학 발전에 기여한 기념비적 건축·구조물들을 발굴, 그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해 건설산업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기획물을 연재한다.

[세상을 뒤흔든 랜드마크] 부활을 거듭한 르네상스의 걸작

성베드로 대성당(San Pietro Basilica)은 가톨릭의 총본산으로서 유럽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원은 성(聖)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4세기의 바실리카(Basilica)식 성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당시 대표 건축가들에 의해 전성기를 맞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했다.

최대 5만 명을 수용하고 중앙 통로 길이는 약 186m, 폭 140m, 높이 46m이다. 바닥 면적은 2만 3000㎡이며 중앙 제대(祭臺)에서 돔까지 높이는 137m에 이른다. 대성당 내부에는 44개의 제단과 400개의 동상 및 석상, 1300개에 달하는 모자이크 그림이 벽면에 장식됐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돼 있다. 대성당과 광장은 위에서 보면 열쇠 모양을 해 ‘천국의 열쇠’라고도 불린다. 성베드로 대성당은 르네상스부터 바로크까지 수많은 거장들이 건축한 건축물로, 가톨릭 예술의 진정한 보물로 알려져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성베드로 대성당. 르네상스의 상징적 건축물로 평가된다. /조선db


■돔(dome) 건축, 하늘을 향한 상상력의 극대화

교황 니콜라스5세는 십자군 전쟁 실패로 인한 교황청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영원의 도시’를 상징하기 위해 로마를 거대한 규모로 재건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교황 율리우스2세(1503~1513)에 의해 실현된다. 그는 새로운 성당이 ‘주위에 군성을 거느리는 태양처럼 빛나면서 만방을 굽어볼 수 있는 성당’으로서 거대한 규모와 교황의 권위를 상징하도록 큐폴라(cupola·돔 형태 지붕)가 높이 치솟아야 한다고 구상했다.

1503년 그는 대성당 신축을 위해 전문가로 구성된 건축위원회를 조직하도록 명한다. 수차례에 걸쳐 설계도를 모집한 결과, 브라만테의 것이 최종 채택됐다. 로마 판테온의 구조와 피렌체대성당의 돔 형식을 도입해 그리스도식 십자가 모양으로 설계됐다.

성베드로 대성당은 판테온의 쉘(shell) 구조를 이용했는데, 천장이 높지 않은 수평 축으로 된 통로를 가다가 갑자기 커다란 돔으로 된 넓은 공간이 나타나도록 구상한 것이다. 관람객들은 막연하게 통로를 걷다가 엄청난 구조로 구성된 굉장히 높은 돔 안에 빠지게 되는 방식이다. 이때 자연스럽게 하늘(천장)을 바라보게 만들어 사람들의 탄식을 자아내도록 구상한 것이다. 이는 고달픈 인생의 여정이 끝난 후 하나님이 통치하는 하늘에 최종적으로 도착한다는 성경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당이라는 것이 신자들의 신앙심을 즉각적으로 강화시키도록 구성된 것인데, 성베드로 대성당은 고전적인 모티브를 반복하고 분절 변형시킨 르네상스 형태에서 바로크의 역동적인 건축 양식이 묻어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건물 외관에서는 바로크 형식으로 생애의 역동성이 흐르다가 건물 맨 안쪽에서 탁 트인 정적 공간으로 인도되도록 구성된 돔은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성베드로 대성당 내부. 대성당 내부에는 44개의 제단과 400개의 동상 및 석상과 1,300개에 달하는 모자이크 그림들이 벽면에 장식되어 있다.


■공사 지연이 루터의 종교 개혁 촉발

브라만테의 건축 설계는 정확한 비례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는 성 베드로가 순교한 지점을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정방형의 그리스도식 십자형을 통해 전체적으로 완벽하고 조화된 균형감을 갖추도록 설계했다. 그러나 당시 설계를 시작한 브라만테의 나이는 62세로 1514년 당시 건물을 받쳐줄 초석과 지주만을 세우고 사망한다. 이후 정방형의 그리스도형 십자가 플랜에서 긴 회당(會堂)부를 추가한 라틴 십자식 플랜이 계획된다. 이후 미켈란젤로가 공사를 맡게 된 1546년까지 라파엘로, 바르다살레 베르네, 상갈로 등 여러 건축가 손을 거치지만 수차례 계획 수정과 공기 지연으로 성당 건축은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공사 지연과 설계 변경은 건설비 남용을 초래했고, 이로 인해 공사 자금이 부족해졌다. 부족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율리우스를 계승한 교황 레오10세는 면죄부를 팔아 기금을 모집했다. 이는 마틴 루터의 항의를 통해 종교 개혁을 발생시켰다. 결국 성베드로 대성당은 종교 개혁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미켈란젤로, 설계 논쟁에 종지부 찍어

설계에 대한 논쟁의 종지부를 찍은 사람이 바로 미켈란젤로이다. 1546년 교황 바오로3세는 당시 71세의 미켈란젤로에게 성당 건축의 최고 지휘를 맡겼으며, ‘신이 보내준 사람’이라고 격찬했다. 미켈란젤로는 전임자의 설계를 비판했다. 불필요한 내·외부 기둥이 많고 외관에만 치중했다는 것이다. 그의 설계대로라면 50년 이상은 더 걸려야 할 것이며, 공사비 역시 엄청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대성당 규모를 축소했으며 브라만테의 초기 계획인 그리스도식 십자가 플랜으로 돌아갔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성베드로 대성당. 관람객들은 막연하게 통로를 걷다가 엄청난 구조로 구성된 굉장히 높은 돔 안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구상은 브라만테와는 전혀 달랐다. 브라만테는 수랑(守廊)을 길게 해 수평과 수직 두 방향성을 공존시키며 내부 공간을 기하학적으로 만들어 다양성을 이루려고 했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수랑을 짧게 해 수평 방향에 시간성과 공간성을 단축시키고 돔으로 상승하는 수직성에 우위를 두었다. 브라만테 계획안에 보이는 8개의 앱스(apse·직사각형 건물 평면에서 입구의 맞은편 마구리 벽면에 설치한 반원형 혹은 다각형의 돌출부) 등을 생략하고 4개의 작은 돔을 더 멀리 떨어뜨려 중앙 돔을 더 크고 장중하게 인식시켰다. 4개의 작은 돔을 모서리 벽면으로 근접시키며 정면을 최소화하고 전면 애디큘라(aedicula)를 최소로 억제하는 등 극적 구성을 취함으로써 중앙 돔을 향한 조망을 강조했다.

미켈란젤로는 사후 자신의 설계를 보장받기 위해 어느 한 부분을 완성한 후 다른 부분에 손을 대는 대신 중요한 여러 부분을 동시에 공사했다. 후계자가 미켈란젤로의 뜻대로 계속 건축하든지 아니면 광범위한 부분을 철거하고 새로 건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1564년 미켈란젤로가 죽은 후 그의 후계자인 자코모 델라 포르타의 지휘 감독 아래 1590년 6월에 45층짜리 빌딩 높이와 맞먹는 거대한 돔이 완공됐다.

성베드로 대성당 1층에 전시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성모상.


■두배로 확장된 건물과 광장에 숨은 뜻

1605년 교황 바오로5세는 미켈란젤로의 설계보다 두 배 정도 더 크게 성당을 확장하도록 했다. 이에 대성당 모습은 다시 라틴형 십자가 모양으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확장 공사는 쉽지 않은 과제였다. 당시 공사 책임자는 마데르노였다. 바로크 양식이 절대 주종을 이루었던 데 반해 대성당 대부분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돼 두 양식을 조화시키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무엇보다 건물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그는 철저히 미켈란젤로의 풍을 따랐지만 미켈란젤로의 양식을 단조롭고 무겁고 고루한 방식으로 해석한 탓에 당시 아무도 그를 칭찬하지 않았다고 한다.

1629년 마데르노가 죽고 베르니니가 뒤를 이었다. 그의 임무는 대성당 내부를 좀 더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었다. 1642년 성당 정면 양쪽에 새로운 종탑을 세우면서 공사를 마무리 짓는다. 베르니니의 건축물 중 가장 찬사를 받는 것은 대성당 앞쪽의 대광장이다. 1656~1667년에 공사했는데 투시 효과를 교묘히 이용했다. 이 광장은 ‘열쇠’ 모양으로 대성당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고, 광장 양 옆의 타원형 회랑은 그리스도의 팔을 상징하도록 설계했다. 결국 팔을 벌려서 그리스도를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감싸 안는 참된 구원자의 모습을 건물과 광장을 통해 표현한 것이다.

그의 천재성이 입증되는 것은 1586년부터 성당 앞으로 옮겨진 오벨리스크와 대성당 건물을 이 타원형 회랑으로 조화를 이루어냈다는 점이다. 광장 중앙에 있는 무게 300t, 높이 25m의 오벨리스크는 로마의 정복을 과시하기 위해 이집트 피라미드 앞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서 1세기 때 로마 황제가 원형 경기장 가운데에 설치했다. 그리스도교 첫 박해를 시작했던 네로시대 권력의 상징물로 여겨진 이 오벨리스크를 성당 광장 중앙에 옮겨 놓은 이유는 광장을 멋있게 장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의 정신을 모든 순례자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 이 오벨리스크를 그리스도의 팔을 상징하는 회랑이 감싸 안도록 설계해 원수까지 포옹하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완성한 것이다.

르네상스는 재생과 부활을 뜻한다. 성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자체도 396년에 완공된 이후 후퇴기를 맞았던 기독교의 부활을 꿈꾸며 재건축한 것이다.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예술가들의 끝없는 열정이 있었다. 성베드로 대성당처럼 여러 예술가들의 혼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응집된 건축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결과적으로 성베드로 대성당은 재생과 부활을 거듭한 르네상스의 가장 대표적인 걸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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