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태동한 한국 근대 건설 산업이 올해 70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건설 산업에 대해서는 긍정보다는 부정, 발전보다는 쇠락하는 이미지가 더 강한 게 현실이다. 땅집고(realty.chosun.com)는 한국건설산업연구원과 공동으로 지금까지 인류 문명과 과학 발전에 기여한 기념비적 건축·구조물들을 발굴, 그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해 건설산업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기획물을 연재한다.
[세상을 뒤흔든 랜드마크] 40년간 세계 最高 지킨 ‘마천루의 아버지’
친구와 함께 들른 분식집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루이스 W. 하인의 사진들을 처음 보고 합성 사진인지 아닌지를 두고 궁금해 했던 기억이 있다. 오래 전 이야기임에도 아직도 사진을 보던 순간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사진 속 배경인 믿기 어려운 높이의 건물과 1931년이라는 촬영 연도 때문일 것이다. 1931년은 찰리 채플린이 출연한 영화 ‘모던타임즈’(1936년)가 개봉되기도 전으로, 흑백 영화와 라디오 방송의 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에 찍힌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의 건설 사진들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더 비현실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1931년 381m로 완공되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된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은 이후로 1973년 세계무역센터가 세워지기 전까지 40여 년 동안 그 순위에 변함이 없었다.
■가장 오랫동안 가장 높은 건물로 군림
1920~30년대 뉴욕은 초고층 건설 붐이 일던 시기였다. 초고층 건물은 기초, 구조 시스템, 엘리베이터, 설비 등의 증가로 건설 비용이 크게 증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해튼에서는 치솟는 땅값으로 건물을 점점 높게 지어야 적정한 임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의 처음 설계안은 건설비에 상응하는 임대 수익이 가능한 경제적 높이인 80층으로 계획했다. 그런데 여기에 추가적으로 81~85층 사무용 5개 층과 86층 전망대, 그리고 17층 높이에 해당하는 61m 구조물이 더해졌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의 엘리베이터가 80층까지 운행하는 것과 81층부터 사용하는 엘리베이터로 분리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경제적 판단에 덧붙여진 세계 최고(最高)를 향한 목표는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서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됐다. 완공 후 첫해 전망대에서 얻은 수익은 그 해 건물 임대로 벌어들인 수익보다 많은 100만 달러였다고 한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의 규모도 그 높이만큼 대단하다. 19만 5000㎡에 이르는 임대 면적은 비슷한 시기 건설된 크라이슬러빌딩의 2배가 넘는다. 67대의 엘리베이터, 5700t에 이르는 철골 기둥과 빔, 1000만장의 벽돌, 6400개의 창문, 그리고 피크시에 동원된 3500명의 인력 등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은 규모 면에서도 놀라운 기록을 가지고 있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은 가장 높은 건물이자 종종 아름다운 외관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여기에는 다소 과장된 부분도 있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의 외관은 당시 유행하던 아르데코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상층부로 갈수록 줄어드는 평면은 디자인이 고려된 것이 아니라 채광과 통풍을 위해 상층부의 면적을 줄여야 높게 건설할 수 있는 당시의 법규를 따른 것이었다. 흔히 381m, 102층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최상부 17층은 기둥으로만 이뤄진 구조물이며, 실제 사용 가능한 공간은 85층까지의 사무 공간과 86층 전망대까지이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 타이틀에 대한 경쟁은 유머러스하다. 1930년 완공된 맨해튼은행빌딩(현 트럼프빌딩)은 282m로 같은 해 완공될 예정이었던 크라이슬러빌딩보다 61㎝가 더 높았다. 그런데 완공을 앞둔 어느 날 크라이슬러빌딩은 90분 만에 56.3m의 탑을 조립여해 318.9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 자리를 차지했다. 맨해튼은행빌딩이 가장 높은 건물이 된 지 불과 2주 만이었다. 1931년에는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80층 높이의 기존 설계안을 변경해 완공되며 크라이슬러빌딩도 11개월 만에 그 자리를 내줬다. 그리고 시작된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초고층 건물 투자가 어려워졌고 마천루 경쟁도 여기서 일단락됐다.
■“102층 완공까지 불과 11개월 소요”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갖고 있는 기록 중 가장 놀라우면서도 높이에 가려 보다 덜 알려진 것이 있다. 바로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의 첫 철골 구조 기둥이 세워진 1930년 4월부터 86층 철골이 세워지기까지 걸린 시간이 6개월에 불과하다는 것. 102층 구조물이 완성되기까지는 단 11개월이 걸렸다. 건축가와 첫 계약을 한 1929년 10월부터 오프닝 행사가 열리는 1931년 5월까지 짧은 기간 동안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의 계획 및 설계, 엔지니어링, 건설, 임대 준비까지 모든 과정이 끝났다. 1개층을 건설하는데 1.4일이 걸렸고, 이것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의 규모를 생각할 때 더욱 대단한 것이다. 철골 구조는 12일, 콘크리트 바닥은 4일, 외부 금속 마감은 35일 등 공사 기간이 단축됐고 건설 비용도 약 2500만 달러로 처음 예산에서 200만 달러가 줄었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의 높이에 대한 기록은 깨졌다. 하지만 맨해튼과 같은 시내 중심에서 매일같이 변화하는 대규모의 건설 자재와 인력을 관리하며 차질없이 지었다는 것, 나아가 공사 기간을 앞당기고 예산까지 절감했다는 것은 현재의 초고층 건물들도 따라잡을 수 없는 기록이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건설 과정에서 이런 성공을 거둔 것은 협업(team-design approach)과 건설사인 스타렛 브라더스 & 에켄(Starrett Bothers and Eken)의 천재적인 건설관리 덕분이었다. 발주자, 설계사, 엔지니어사, 건설사 등 많은 주체가 참여하는 건설사업은 각 영역간 효과적인 의사소통이 필요하며, 지금도 건설사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소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의 건축회사인 쉬리브, 램 & 하먼(Shreve, Lam and Harmon)과 건설사인 스타렛 브라더스 & 에켄, 그리고 발주자와 각 분야 전문가들은 건설 계획부터 문제 해결까지 한 팀으로 일했다. 큰 손실로 이어지는 설계 오류나 건설 지연없이 촉박한 기간 내에 완공이 가능했던 것은 이러한 협업이 바탕이 된 것이다.
건설 기간을 줄이려는 의지는 설계가 완성되기 전에 공사를 시작하는 모험적 방법을 택하도록 했다. 패스트트랙(fast track)으로 불리는 이 방식은 이후 거대 프로젝트에서 유용하게 사용됐다. 패스트트랙은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상암 월드컵경기장의 촉박한 완공일을 맞추는데 사용됐다. 실패 위험이 높은 이런 공겁으로 성공을 만들어내기까지 건설사의 뛰어난 건설관리 능력과 의지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높이와 건설 과정에서 보여준 혁신적인 기록들이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의 경제적 이익까지 보장해주지는 못했다. 뉴욕 마천루들의 경쟁이 최고조에 이른 시점에서 대공황이 시작됐고 오피스 빌딩에 집중된 투자는 임대 시장을 공급 과잉 상태에 이르게 한 것이다. 1933년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서 임대된 공간은 4분의 1에 불과했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전부 임대되고 흑자를 보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0년대 후반이 되어서였다.
1931년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건설 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모험과 도전 의지는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최고의 마천루 중 하나로 기억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