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태동한 한국 근대 건설 산업이 올해 70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건설 산업에 대해서는 긍정보다는 부정, 발전보다는 쇠락하는 이미지가 더 강한 게 현실이다. 땅집고(realty.chosun.com)는 한국건설산업연구원과 공동으로 지금까지 인류 문명과 과학 발전에 기여한 기념비적 건축·구조물들을 발굴, 그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해 건설산업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기획물을 연재한다.
[세상을 뒤흔든 랜드마크] 4500년전 인류 최초의 국책 건설사업
이집트에는 여러 지역에 크고 작은 80여 개의 피라미드가 있다. 이 중 기자(Giza) 지역의 쿠푸 대피라미드(Khufu’s Great Pyramid)가 이집트에서 가장 크고 기원전 2550년경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필론의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서 가장 오래 전에 건설된 것이고, 원형을 유지한 채 현존하는 유일한 건축물이다. 또 유명한 역사가인 헤로도투스를 비롯한 많은 유럽 지식인들이 피라미드에 대해 그들이 들었거나 보았던 내용을 저술로 남겼다. 준공 이후 4500년이 넘는 현재까지 인류 역사에서 대피라미드는 연구의 대상이자 신화로 기록되어 왔다.
■마스타파에서 계단식 피라미드로
19세기(1889년)에 에펠탑(300m)이 건설되기 전까지 대피라미드는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137m)이었다. 총 중량은 700만t에 달하고, 230만 개의 2.5t 석회석 돌덩어리로 이뤄져있다. 건설 당시는 철기를 사용하기 이전 시대이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돌과 구리로 만든 연장으로만 어떻게 이런 구조물을 건설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의문점을 던져왔다. 일각에서는 당시 인류의 기술 수준으로는 대피라미드를 건설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따라서 그들은 피라미드 건설에 대해 외계인설과 아틀란티스문명설을 주장한다.
고대 이집트인은 사후(死後) 세계의 존재를 굳게 믿었다. 그들은 시신과 수장품을 영구 보존하기 위한 장치를 갖춘 무덤을 짓는데 최선을 다했다. 특히 사자(死者)의 미라(mirra)를 사막의 바람과 짐승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을 강구했다. 그들은 진흙 벽돌을 재료로 상부가 평평하고 옆이 경사진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를 마스타파(mastaba)라고 하며 피라미드의 원형이다. 마스타파는 제3왕조(기원전 2600년경)의 조세르 시대에 연마된 돌을 사용한 계단식 피라미드로 발전했다. 사카라 지역에 건설한 피라미드가 세계 최초의 돌로 만든 피라미드로 기록됐다. 제4왕조의 스네프루(쿠푸의 아버지)는 계단식 피라미드에서 벗어나 현존하는 피라미드의 전형을 수립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다슈르의 굴절 피라미드와 붉은 피라미드가 그 사례이다.
■3번의 대대적인 설계 변경 거쳐 완공
대피라미드의 바닥 변 길이는 남쪽 230.45m, 동쪽 230.39m, 서쪽 230.36m, 북쪽 230.24m이다. 원래의 높이는 146.60m로 확인되고 있으나, 정상부 9m가 파손돼 현재 높이는 137.20m이다. 바닥 변과 피라미드 꼭지점의 경사각은 51도로 측정된다. 돌을 쌓은 단층도 원래 210개 단계였으나, 정상부의 피복석(17만 개)이 훼손돼 현재는 203개 계단만이 남아 있다. 바닥 면적은 5㏊이고, 피라미드를 구성하는 석재는 2.5t의 돌덩어리 230만 개가 사용됐다. 총 중량은 거의 700만t에 달한다.
대피라미드의 내부 구조는 입구(건설 당시의 북극성 위치에 맞춰져 있음)에서 조금 내려가면 상향 경사로와 하향 경사로가 각기 26도의 기울기로 나타난다. 하향 경사로를 쫓아서 내려가면 첫번째로 계획된 장례방(葬禮房)이 있는데 이곳은 지표면에서 약 30m 아래이다. 이때 제1차 설계 변경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즉, 제1의 장례방을 완성하지 않은채 지표면으로부터 21m 높이에 이른바 ‘왕비의 방’으로 불리는 제2의 장례방을 만든 것이다. 왕비의 방에서 수평 갤러리와 대회랑(大回廊)이 연결된다. 대회랑은 길이 47.85m, 폭은 기저 부분에서 2.09m에 지나지 않지만 높이는 8.5m이다. 대회랑을 따라 가면 제3의 장례방인 ‘파라오의 현실(玄室)’이 지상으로부터 42m에 위치한다. 파라오의 현실에는 남쪽과 북쪽으로 높이 20㎝, 폭 22㎝의 환기 구멍이 있다. 일부 천문학자는 환기 구멍이 기원전 2600~2400년경의 오리온자리 세 별에 정확하게 조준돼 있다고 발표하면서, 이를 천체창이라고 주장한다. 대피라미드에 각기 다른 3개의 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전문가들은 대피라미드 건설사업은 적어도 3번의 대대적인 설계 변경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놀라운 측량 기술과 천문학 수준
대피라미드의 네 면은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피라미드의 자오선(子午線)은 17세기에 건설된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와 프랑스 파리 천문대의 정확도를 능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라미드 네 변의 길이 차이는 21㎝에 불과하다. 피라미드 기초가 들어설 바위에 물길을 파고 물을 부은 다음 막대를 꽂아 물높이를 표시하고, 수면의 높이까지 바위의 표면을 깎아서 기초의 정확한 레벨을 시공했다. 그 당시에는 나침반이 없었기에 피라미드 각 면의 방위를 잡는 데는 별을 관측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대피라미드의 주요 자재는 석재이고, 용도에 따라 3곳의 채석장에서 석재를 제작했다. 기자 지역에서 생산되는 사암은 내부의 심재(心材)로 썼다. 외벽 마감재로 석회석을 사용했는데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50㎞ 떨어진 투라 지역의 채석장에서 운송했다. 대회랑과 현실의 내부 석재로 사용된 화강석은 900㎞ 떨어진 아스완에서 제작했다. 아스완에서 제작한 석재는 나일강이 범람하는 시기에 거대한 거룻배를 만들어 항구까지 운반한 이후 현장까지 썰매를 이용해 운송했다. 대피라미드의 석재는 평균 중량이 2.5t이고 큰 것은 70t이다. 운송 선박을 건조하는 기술이 핵심 요소임에 틀림없는데 이집트는 기원전 14세기에 이미 2000t이 넘는 선박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보유했다는 역사 기록을 참조하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장에 반입된 석재를 설치 위치까지 옮기는 방법과 석재를 들어서 정확한 위치에 설치하는 거중기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는 헤로도투스가 언급한 이후 2000여 년 동안 많은 이집트학 전문가에게 주요한 연구 주제였다. 고대 건설 기술을 고려하면 경사로를 만들어 석재를 설치 위치까지 옮기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경사로를 단일 경사로 혹은 4면에 동일한 크기의 경사로를 만들었다는 주장과 피라미드 주위를 돌아가면서 올라가는 경사로를 만들었다는 이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투입 건설 인력 규모 사실과 달라
대피라미드에 동원된 건설 인력에 대해서는 이를 거론한 헤로도투스 시대부터 최근의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 이르기까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정보가 많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폭군 파라오가 수많은 노예(주로 이스라엘인)들을 채찍으로 혹독하게 부려서 대피라미드를 만든 것으로 나온다. 헤로도투스는 10만 명의 인력이 투입돼 3개월마다 교체됐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대피라미드를 건설한 이집트 고왕국에서는 노예 제도가 없었고, 밑변이 200m인 공간에 10만 명의 노무자를 세워 놓을 수도 없다.
건설 노무자의 주거지 터를 발견하고 조사한 결과, 주거단지는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고 가족 단위의 생활이 가능한 복합 기능을 갖춘 마을로 밝혀졌다. 이런 조사 결과를 토대로 추정해보면, 채석장에서 5000명의 석공이 일했고 석재 운반에 5000명의 노무자가 투입됐다. 건설 장비 및 공구 조달·음식 공급 등의 지원 업무에 5000~1만 명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휼 목적도 지닌 초대형 국책사업
피라미드가 파라오의 영생을 신탁하는 종교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복합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건설한 복합 시설물이라는 데에 전문가들은 동의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 시절에 나일강이 정기적으로 범람했고, 물이 빠지면 상류에서 운반된 퇴적물에 의해 비옥한 농토가 만들어진다. 이런 자연 현상을 바탕으로 이 지역은 고대 4대 문명지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범람 시간은 최소한 3~4개월(매해 6~10월) 동안 지속됐고 이 시기에 이집트의 모든 농부들은 농사일을 할 수 없어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국가가 마련한 정책이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사막의 세찬 바람으로부터 수확한 곡물을 다음해까지 안전하게 저장할 수 있는 곡식 창고로도 피라미드를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입증하는 역사 기록이 여러 군데 남아 있다. 즉, 선왕이 죽으면 그의 피라미드는 곧바로 공사를 중단하고 선왕을 안장함으로써 수많은 피라미드가 완성되지 못한 채 시급히 마감되었으며, 새로이 등극한 파라오는 즉위 즉시 자신의 피라미드를 착공했다.
고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 건설은 왕조의 운명을 걸고 국가의 전 자원을 투자해 시행한 매우 성공적인 통치 수단의 하나이자 인류 역사상 최초의 초대형 국책 공공 건설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