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태동한 한국 근대 건설 산업이 올해 70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건설 산업에 대해서는 긍정보다는 부정, 발전보다는 쇠락하는 이미지가 더 강한 게 현실이다. 땅집고(realty.chosun.com)는 한국건설산업연구원과 공동으로 지금까지 인류 문명과 과학 발전에 기여한 기념비적 건축·구조물들을 발굴, 그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해 건설산업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기획물을 연재한다.
[세상을 뒤흔든 랜드마크] 고대 로마를 하나로 묶은 오락시설
콜로세움(Colosseum)은 세계 신(新) 7대 불가사의로 뽑힌 유일한 오락 시설물이자 유럽을 대표하는 고대 구조물이다. 콜로세움의 정식 명칭이자 원래 이름은 ‘엠피테아트룸 플라비움’이었다. 이는 플라비우스(Flavius) 왕조가 세운 원형 투기장이라는 뜻 정도로 해석이 가능하다. 플라비우스 왕조는 네로(Nero) 황제 이후 황제의 암살과 자살로 인한 혼란기에 종지부를 찍고 추대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황제부터 27년 동안 로마를 지배했던 단명한 왕조이다. 이 원형 경기장을 콜로세움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8세기에 ‘영국 교회사’를 집필한 수도승 베다 베네라빌리스(Beda Venerabilis)가 “로마의 역사는 세계의 역사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표현한 문장에서 로마의 상징물로 콜로세움을 사용한 이후부터다.
■로마 시민 8만명 수용한 경기장
네로 황제의 폭정을 견디다 못해 폭발한 로마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의 친위대까지 가세하는 바람에 황제는 한 농가에 피신해 있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콜로세움은 네로 황제의 황궁(Golden House)을 헐고 그 자리에 세워졌다. 당시 로마인에게 최대 오락거리인 검투 시합과 전차(戰車) 경주와 같은 볼거리를 공연하는 초대형 원형 경기장을 로마의 심장부에 건설한 것은 현대 정치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른바 ‘3S(Screen·Sport·Sex) 정책’과 유사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런 목적과 배경 속에서 건설된 콜로세움은 새로운 왕조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개조(開祖)인 베스파시아누스는 콜로세움을 기획하고, 공사는 서기 70~72년에 시작했지만 3층까지만 짓고 사망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인 티투스(Titus)가 지상 구조물을 서기 80년에 완성했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도미티아누스(Domitianus)의 재위 기간(81~96년)에 지하 시설물까지 마무리해 현재의 콜로세움이 완성됐다.
콜로세움은 지상 4층, 높이 57m 구조물이며, 평면은 육상 트랙과 같은 타원형이다. 타원형의 긴 지름은 188m이고, 짧은 지름은 156m이다. 원 둘레는 527m이고, 타원 면적은 2만 4000㎡이다. 콜로세움의 내부 경기장은 길이 83m, 폭 48m이며, 경기장으로부터 높이 4.5m 위에 설치된 관중석으로 둘러싸여 있다.
콜로세움이 수용할 수 있는 관객 규모는 5만 명(좌석 4만 5000개, 입석 5000명) 정도이지만 최대 8만 명까지 입장이 가능했다고 한다. 당시 로마 시민이 100만 명 정도였던 것을 고려할 때, 콜로세움은 로마 시민의 20분의 1을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경기장이었던 것이다.
■12m 암반에 기초 올려…실용성 강조
콜로세움 부지는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 중 커다란 인공 연못이 있던 자리로 연약 지반이었다. 이러한 연약 지반을 개량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연못의 물을 뽑고, 암반에 도달할 때까지 호수의 늪을 파냈다. 암반 위에 12m 깊이의 버림 콘크리트를 타설해 견고한 바닥 기초가 시공됐다. 콜로세움의 하중이 걸리는 외벽의 기초는 인근 티볼리(Tivoli)에서 채석한 트래버틴 스톤(travertine stone)을 철근과 모르타르를 사용해 콘크리트 바닥 위에 축조했다. 트래버틴 스톤으로 시공한 4개의 터널과 콘크리트 격실은 경기장과 관람석의 지지대 기능을 담당했다. 콜로세움 건설에 사용된 주요 자재인 석회석은 10만㎥였고, 철근은 330t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콜로세움의 상부 구조물은 4개의 다른 층으로 구성된다. 상부 구조물의 높이는 40m이고, 각 층의 높이는 10~14m이다. 1층은 토스카나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의 원기둥이 80개의 아치를 떠받치는 형태로 배치됐다. 4층은 뜨거운 햇빛을 차단하는 초대형 천막의 기둥을 위한 8개의 격실이 있었다. 외벽은 트래버틴 스톤을 사용했고 내벽은 로마식 콘크리트라고 부르는 포졸란(화산회와 석회석을 2 대 1의 비율로 섞어 물로 반죽함)을 사용했다. 건물 내부 통로는 대리석을 깔았다.
각 층의 기둥 형식은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양식을 반영했지만, 콜로세움은 전형적인 로마 건축 양식이다. 즉, 하중을 견디는 하부 기초와 외벽은 값비싼 자연석을 썼지만 내부 구조물인 격실과 담은 저렴하고 가벼운 콘크리트와 기와를 사용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콜로세움은 실용성을 강조하는 로마 건축의 특징을 반영힌다. 아치 구조를 많이 사용한 것도 콜로세움이 가진 로마 건축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여성·노예를 위한 관람석도 배치
스탠드 등을 설치해 중앙을 볼 수 있게 해놓은 경기장이나 공연장을 아레나(arena)라고 정의하고 있다. 아레나의 어원은 라틴어로 모래라는 뜻이다. 즉, 검투사가 싸우면서 흘리는 피를 흡수하기 좋도록 하고, 나무 바닥판의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 모래를 깔아놓은데서 지금의 뜻으로 발전한 것이다. 콜로세움의 아레나는 지하층을 나무판으로 덮어서 만들었고, 계단을 통해 출입이 가능했다. 아레나 하부에는 여러 개의 지하층 격실이 있고, 이 공간은 검투사의 준비실과 맹수를 가두는 시설로 이용했다. 지하 격실은 콜로세움 외부와 연결된 터널을 통해 접근이 가능했다.
관람석은 37도의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어 관객 모두에게 넓은 시야를 제공한다. 관람석은 당시 사회 신분에 따라 5개 등급으로 위치가 정해져 있었다. 아레나와 가장 가까운 좌석은 성직자, 황족, 원로원, 외교관 등과 같은 최상위 신분의 사람이 앉았다. 같은 층에 황제와 황후를 위한 2개의 특수 좌석 박스가 배치됏다. 다음 줄의 관람석은 군인이나 귀족용이었다. 귀족용 관람석의 뒤쪽은 평민을 위한 좌석이었는데, 이 중 낮은 관람석은 부자에게 할당되고 높은 자리는 가난한 평민에게 배당됐다. 가장 높은 관람석은 최하층 계급, 여성, 노예가 이용했다.
콜로세움은 거의 500년 동안 로마 시민에게 검투 경기와 같은 오락거리를 제공했던 운동 및 예술의 전당이었다. 6세기까지 콜로세움에서 검투 경기가 개최됐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중세에 들어서면서 콜로세움은 오락 목적으로는 더 이상 이용되지 않고, 종교적인 목적과 주거용으로 주로 사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