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태동한 한국 근대 건설 산업이 올해 70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건설 산업에 대해서는 긍정보다는 부정, 발전보다는 쇠락하는 이미지가 더 강한 게 현실이다. 땅집고(realty.chosun.com)는 한국건설산업연구원과 공동으로 지금까지 인류 문명과 과학 발전에 기여한 기념비적 건축·구조물들을 발굴, 그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해 건설산업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기획물을 연재한다.
[세상을 뒤흔든 랜드마크] 세계에서 가장 긴 해저터널
1988년 3월 13일 일본 북부의 홋카이도와 혼슈를 잇는 철도가 개통됐다. 바로 세이칸 해저터널이 뚫린 것이다. 이날은 일본의 오랜 숙원 사업 중 하나였던 4개 주요 섬(큐슈·시코쿠·혼슈·홋카이도)을 하나로 묶는 데 성공한 날로 기억된다.
세이칸 해저터널은 현존하는 터널 중 가장 길고 깊다. 총 길이가 53.85㎞이며 이 중 해저터널은 23.3㎞다. 유로터널 보다 13.7㎞ 짧지만, 전체 길이는 2.35㎞ 더 길다.
세이칸 해저터널은 해저면으로부터 약 100m 아래를 지난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다. 유로터널은 평균 깊이가 50m다. 공사 기간도 유로터널보다 무려 18.5년이 더 걸렸다. 터널의 굴진 속도가 한달에 1667m였던 유로터널의 굴착 공사 기간은 30개월이었다. 하지만 세이칸터널은 매년 평균 굴진 속도가 2560m 정도로 느렸고, 굴착에만 21년이 걸렸다. 실제 터널 개통은 이보다 3년 뒤인 1988년 3월로 총 공사 기간은 24년이다. 공사비는 1988년 기준으로 약 6900억엔(6조 9000억원)이다.
■도쿄발 런던행 열차의 꿈
1988년 3월까지 혼슈와 홋카이도를 잇는 교통은 해상과 항공 수단이 전부였다. 두 섬은 23㎞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두 섬 사이에 놓인 스가루해협은 조류와 풍랑이 거세기로 유명했다. 1939년부터 일본은 혼슈와 홋카이도를 해저로 연결하고, 다시 홋카이도에서 해저터널을 통해 러시아 사할린을 연결한 후 유럽을 거쳐 영국까지 열차로 간다는 원대한 꿈을 계획했다.
세이칸터널은 1954년 9월 조기 착공될 수도 있었다. 당시 태풍으로 5척의 연락선이 침몰하고 1430명의 인명 피해가 나면서 일본 열도는 터널 조기 건설 여론으로 들끓었다. 그러나 터널은 바로 착공되지 못했다. 스가루해협의 빠른 조류와 불규칙한 기후, 그리고 수심이 얕은 지역조차 140m에 달해 난공사가 예상됐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험 시추한 결과, 지질이 당시 건설 기술로는 무모할 만큼 불규칙했다. 터널이 착공된 건 그로부터 10년 후인 1964년이다.
■세계 최초의 선도갱 공법 도입
유로터널과 달리 세이칸터널은 복선(複線) 철도 터널이며 공법에도 차이가 크다. 세이칸터널은 철도가 다니는 본선 터널과 공사를 위한 작업 갱도, 그리고 본선과 작업 갱의 공사 이전에 지질 상태를 사전 점검하기 위한 선도갱의 3선으로 구성된다.
본선 터널의 공법은 당시로서는 최신 공법이었다. 터널 건설에는 ‘착공→폭약 장치→발파→바위 부스러기 제거→지보공 설치→착공’ 순으로 이뤄지는 일반 산악 터널에서 사용하던 공법을 그대로 채택했다. 하지만 해저 터널이라는 특성 때문에 침출수를 막는 공법이 핵심 기술로 등장했다.
당시 기술진은 “해저에서 최고 100m까지 굴착해 가는 과정에서 뿜어 나오는 고압 용출수와의 투쟁이 공사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말했을 정도. 용출수 압력은 1㎥당 240t이나 된다.
유로터널에서는 대용량의 굴착 장비가 동원된 ‘TBM+실드 공법’이 사용됐지만 1964년엔 이런 기술이 없었다. 당시로서는 조사를 위한 선도갱을 파들어 간다고 하는 생각 자체가 획기적이었다. 해저 공사의 최대 난관은 예기치 못한 지질로 인해 발생하는 대량 출수 사고다. 이는 치명적 손상으로 이어지는 만큼 굴착을 통해 실제 상태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작업을 계획할 수 없었다. 선도갱이 필요했던 이유다.
세이칸터널 개통은 일본 토목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당시 이 공사에 참여했던 기술자는 유로터널 공사에 기술 자문관으로 고용됐고 일본이 개발한 대용량 실드 공법과 터널 굴착 장비인 TBM이 유로터널에 투입되기도 했다.
■난공사 끝에 얻어낸 3대 기술
세이칸터널이 있는 스가루해협의 해저는 무수한 단층 파쇄대와 연약한 암반, 암반 사이로 흐르는 초고압의 출수 등 당시 기술로는 엄두를 낼 수 없을 만큼 난공사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적인 확신없이 난공사에 도전한 일본 건설 기술자들의 도전 정신은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고, 이를 상품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일본이 세이칸터널 공사에서 얻어낸 3대 기술은 오늘날에도 인정받고 있다.
첫번째가 선진 시추 공법이다. 이는 작업자를 위한 작업갱이나 철도 개통을 위한 본선갱 굴착에 앞서 지질과 용수 상태를 정확하게 분석해 내기 위한 것이다. 선진갱보다 300m 정도 앞에서 지질 상태를 수평으로 시추해 그 결과로 지반과 출수 상태를 파악하는 기술이다. 이때 도입한 기술은 미국에서 석유 굴착용으로 개발한 ‘와이어라인 공법’이었다. 그런데 일본 기술자들은 이를 자신들에게 맞도록 바꾸어 와이어 대신 물을 사용하는 이른바 ‘리버스 공법’으로 개조했다.
두번째는 지수 주입 공법이다. 일반적인 지하 터널 굴착과 달리 해저 터널은 물이 스며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따라서 암반의 균열을 막아 차수시키는 공법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개발한 기술이 물유리와 시멘트 반죽을 섞어 개발한 약제를 암반 균열 사이로 주입하는 이른바 ‘지수주입(止水注入) 공법’이었다. 당시만 해도 물유리 혹은 시멘트 반죽을 별개로 주입하는 방법을 썼다.
세번째는 터널 굴착 후 벽면을 보호해주는 콘크리트 분무(일명 숏크리트 분무) 기술이다. 터널을 굴착하면 주위 지반이 느슨해지는데 이 경우 터널 주위를 짓누르는 토압(土壓)과 용수가 증가해 갑작스런 붕괴나 출수 현상이 생긴다. 이는 터널과 작업자 안전을 위협한다. 이를 막기 위해 개발한 것이 굴착 후 곧바로 콘크리트를 암반에 분무시키는 공법이다. 당시 숏크리트 공법은 물과 모래, 시멘트를 혼합해 모르타르를 주입하는 것이었지만 세이칸터널 기술자들은 모래와 시멘트를 먼저 분무한 후 나중에 물과 모르타르를 섞어 뿌리고 이어 모래와 자갈을 섞어 분무한 후 최종적으로 다시 모르타르와 골재를 혼합시키는 공법을 개발해 성과를 거뒀다.
세이칸터널은 일본 건설 기술자들의 프론티어 정신이 없었다면 성공할 수 없었다. 세이칸터널 공사에서는 네번의 대량 출수 사고가 있었다. 1976년에는 시간당 5000t이 넘는 물이 암반을 뚫고 뿜어나오는 대형 사고가 났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선도갱, 작업갱, 본선갱 모두 침수당했다. 이때 바닷물과 함께 주변에서 흘러들어온 뻘과 토사는 아직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다. 이런 대형 사고에도 불구하고 당시 기술자들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저력이 오늘날 일본 건설 기술을 탄생시킨 원동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