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태동한 한국 근대 건설 산업이 내년이면 70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건설 산업에 대해서는 긍정보다는 부정, 발전보다는 쇠락하는 이미지가 더 강한 게 현실이다. 조선닷컴의 부동산·인테리어 콘텐츠 플랫폼 땅집GO는 한국건설산업연구원과 공동으로 지금까지 인류 문명과 과학 발전에 기여한 기념비적 건축·구조물들을 발굴, 그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해 건설산업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기획물을 연재한다.
[세상을 뒤흔든 랜드마크] ⑧세고비아의 수도교
스페인 마드리드 근교의 작은 도시 세고비아는 ‘수도교’로 유명하다. ‘세고비아의 수도교’라 불리는 이 거대한 구조물은 광장 사이를 가로지르며 기념비처럼 우뚝 서 있다. 그런데 사람들을 감탄시키는 이 구조물의 용도는 기념비도, 신전(神殿) 도 아닌 상수도 시설이다.
다소 생소한 수도교는 수로(aqueduct)를 연결하는 다리를 말한다. 물을 끌어올리기 위한 동력이 없던 시대에는 물의 낙차를 이용해 수원(水源)으로부터 도시로 물을 가져왔다. 이 때 로마인들은 지형을 극복하고 물이 일정 낙차를 유지하며 흐르게 하기 위해 수도교를 건설했다. 실용 학문을 중시했던 로마인들은 도시 공공시설과 도로·교량 등 뛰어난 인프라 유산을 남겼다. 수로는 로마의 발명품은 아니지만 뛰어난 도시 건설자인 로마인들은 상수 공급을 위해 수로와 수도교를 건설하고 도시 상하수도 시설을 체계적으로 구축했다. 아직도 유럽 곳곳에는 로마시대 수로와 수도교 유적이 남아있고 이 중 세고비아의 수도교는 약 2000년 전 건설하던 때의 모습을 유지해 당시 건설 역량을 웅변하고 있다.
■접착 부재 없이 중력으로만 버텨
세고비아는 도시에서 15km 떨어진 곳까지 수로를 연결해 필요한 물을 공급받았다. 당시에는 물이 오염됐을 때의 피해를 막기 위해 샘을 수원으로 선호했지만 세고비아는 샘이 적어 불가피하게 작은 강을 수원지로 선택했다. 수로는 프리오강에서부터 산을 따라 내려오고 도시에 도착하기 전 ‘엘 카세론(el Caseron·큰집)’과 ‘카사 데 아구아(Casa de Aqua·물의 집)’라는 물 저장소를 거친다. 저장소에 모인 물은 불순물이 가라앉고 도시에는 깨끗한 윗물이 공급된다. 물 저장소를 통과한 수로는 도시 외벽에 도착하기 전 깊은 분지를 건너야 했는데 이 구간이 바로 ‘세고비아의 수도교’이다.
현재 수도교가 건너는 분지에는 아르티예리아 광장(Plaza Artilleria)과 아소게호 광장(Plaza Azoguejo)이 있다. 수도교의 거대한 기둥 행렬은 두 광장 사이를 가로지르며 세고비아에 독특한 색을 입힌다. 수도교와 세고비아의 옛 시가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는데, 수도교의 기념비적 가치와 훌륭한 보존 상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경관을 가진 곳으로 인정받고 있다. 수도교의 정확한 건축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기둥에 새겨진 기록을 보면 서기 1세기쯤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11세기에는 무어인들의 침략으로 훼손됐다가 15세기 복구됐고 이후 20세기까지도 물을 공급했다.
수도교는 총 길이 728m, 최대 높이 28.5m에 이른다. 수도교에는 2만 400개의 화강암이 사용됐다는 가장 큰 화강암은 무게가 2t이나 된다고 한다. 수도교는 규모뿐 아니라 건설 방식도 현대인에게 놀라움을 준다. 수도교는 화강암을 쌓아올린 120개의 기둥과 75개의 1층 아치, 44개의 2층 아치로 구축되어 있는데, 시멘트를 사용하는 로마의 다른 건축물과 달리 여기에는 시멘트, 꺽쇠 같은 접착 부재가 사용되지 않았다. 기둥과 아치의 커다란 화강암들은 정교하게 쌓아올려져 오로지 중력에 의해 서 있는 것이다. 접착 부재가 사용되지 않은 수도교는 부재의 변형에 유연성을 가지게 돼 작은 지진이나 바람, 온도 변화에 더 강한 구조물이 됐다.
■“장식없어 더 아름답고 웅장”
수도교에서는 장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상수 공급이라는 실용적인 목적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도교는 장식이 제외되면서 오히려 자체의 구조적 웅장함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장식에 치중하지 않는 건축 방식은 구조적 아름다움을 부각시킨다.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서인지 세고비아의 수도교에는 ‘악마의 다리’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 이 별칭은 악마가 다리를 지어줬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물을 길어오기가 너무 힘들었던 한 여인이 “물을 길어주면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혼잣말을 하자 악마가 찾아왔다. 악마는 닭이 울기 전까지 하룻밤 동안 다리를 놓아주고 여인의 영혼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밤새 돌을 옮겨 놓는 소리가 마을에 울렸고, 악마는 마지막 돌을 옮기면서 영혼을 얻을 생각에 춤을 추었다. 그런데 그 때 닭이 울었다. 악마는 마지막 돌을 던져 놓고 사라졌고, 아침이 되자 마을 사람들은 그 돌을 옮겨 다리를 완성했다. 수도교의 돌들에는 건설 당시 돌을 들어올리기 위해 뚫어 놓은 작은 구멍들이 있는데 이 구멍들을 악마의 손가락 구멍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기술과 자본, 시대정신의 산물
도시를 뒤덮고 있는 현대의 수많은 건축물 중 대다수는 2000년 뒤에는 시간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거나 더 이상 사람들에게 감동과 쓸모를 주지 못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세고비아의 수도교는 현대 기술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긴 시간 동안 아름다움과 유용함을 선사해 왔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실용적이고 웅장하며 오랜 세월 도시의 자랑이 된 건설 상품의 탄생 배경에는 기술과 자본 그리고 시대정신이 있었다. 기술과 자본은 어느 시대에서든 건설 상품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건설 상품으로서의 상수도 시설은 오직 로마의 시대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로마 황제에게 도로와 다리 건설은 영토 확장과 같은 업적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실용성을 중시하고 건설을 명예로운 일로 여기는 로마의 시대정신으로부터 뛰어난 건설 기술과 시대·장소를 넘어서는 수많은 건설 상품들이 탄생한 것이다. 건설 상품을 통해 로마 황제의 이름과 로마제국은 정복자가 아닌 건설자로서 더 큰 의미를 남기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