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태동한 한국 근대 건설 산업이 내년이면 70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건설 산업에 대해서는 긍정보다는 부정, 발전보다는 쇠락하는 이미지가 더 강한 게 현실이다. 조선닷컴의 부동산·인테리어 콘텐츠 플랫폼 땅집go는 한국건설산업연구원과 공동으로 지금까지 인류 문명과 과학 발전에 기여한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발굴, 그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해 건설산업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기획물을 연재한다.
[세상을 뒤흔든 랜드마크] ④‘런던의 명물’ 거킨빌딩
템즈강 북쪽 ‘30 세인트 메리 엑스’街에 건설
오이지 모양에 지상 40층, 어디서든 눈에 띄어
내부 사무공간은 사각형 모양 ‘식스 핑거’ 배치
에너지 사용량 40% 줄여…‘원초적 본능2’에 등장
영국 런던 템즈강 북쪽을 바라보면 유난히 눈에 띄는 건축물이 있다.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이 건물은 ‘거킨(Gherkin·오이지)’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이 빌딩의 정식 명칭은 ‘30 세인트 메리 엑스(30 St Mary Axe)’로 거리 이름을 그대로 건물명으로 쓰고 있다. 건물 모양이 오이지를 닮아서 거킨빌딩 혹은 건물의 소유주인 스위스 재보험사의 이름을 따서 스위스 리(Swiss Re) 빌딩으로도 불린다.
■런던을 상징하는 현대 건축물
거킨빌딩은 독특한 외관이 런던의 역사성과 적합하지 않다는 논란 속에서 건설됐다. 그러나 완공 후에는 RIBA(영국왕립건축가협회)가 주는 스털링상(Stirling Prize)을 포함해 많은 상을 휩쓸었다. 2006년엔 BBC에 의해 런던을 상징하는 현대 건축물로 뽑혔다. 거킨빌딩은 역사와 전통이 강조된 도시와 잘 어우러지며 사람들에게 특별한 매력을 전한다.
거킨빌딩의 위치는 런던 금융 중심가인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이다. 원래 이 땅에는 발틱 익스체인지(Baltic Exchange)라는 건물이 있었다. 해운업계 정보를 사고 파는 거래소였다. 그런데 1992년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폭탄 차량이 돌진하면서 파괴됐다.
런던시와 영국 문화재국(English Heritage)은 파괴된 건물을 복원하려고 했지만 피해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결국 다시 짓는 것으로 결정됐다. 이후 1996년 처음 제안된 지상 386m 높이의 밀레니엄타워(Millennium Tower) 프로젝트는 거부됐다. 런던에서는 역사적인 건축물과 도시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건물 높이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탓이다.
그렇지만 2000년 8월 런던시는 지상 40층, 높이 180m의 거킨빌딩 건축을 허가하게 된다. 런던에서 고층 건물에 대한 승인이 난 것은 25년 만이었다고 한다. 거킨의 건설을 승인한 배경에는 런던의 금융 중심지가 이동하고 있던 당시 상황도 작용했다. 런던 시내는 6층이 넘지 않는 옛 건물들이 대부분이어서 사무 환경이 좋지 않았다. 이에 신개발지인 카나리워프(Canary Wharf)로 기업들이 이전하고 있었다. 당시 정책결정자들은 도시 이미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됐고, 거킨의 높이와 독특한 디자인이 보수적인 런던 당국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친환경 빌딩의 아이콘
거킨의 평범하지 않은 모습은 단지 외형적인 새로움만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거킨의 오이지 모양은 멋진 외관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주변 지역과 조화를 위한 것이며, 건물 구조 형식으로부터 비롯된 표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더 크다. 상층부로 갈수록 줄어드는 평면은 고층 건물의 위압감을 줄이는 역할을 하며, 도시 경관이나 주변 지역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한다. 원뿔 형태의 빌딩은 실제보다 작게 느껴져 주변 건물과 규모 면에서 조화를 이룬다.
건물 중심에는 엘리베이터실 포함한 원형의 코어부가 있다. 각 층은 이 코어를 둘러싸고 ‘여섯손가락(six fingers)’으로 불리는 6개의 사각형 사무 공간들이 배치됐다. 사무 공간들 사이에는 삼각형 공간이 생긴다. 이 삼각 공간은 수직으로 뚫려 자연광을 건물 깊숙이 끌어들이며 아트리움(atrium·중앙정원)과 같은 역할을 한다.
사무실 평면은 매 층마다 5도씩 어긋나게 배치해 각 층에 발코니가 생긴다. 이같은 평면 배치의 변화는 나선의 궤적을 만들며 건물 외벽의 나선무늬와도 일치하게 된다. 건물 외벽은 철골 기둥과 다이아몬드형 창문으로 구성된다. 건물은 곡면 형상이지만 실제 사용된 유리는 단 한 장을 제외하고 모두 평면으로 제작됐다. 단 한 장 사용된 곡면 유리는 건물 꼭대기의 천창 유리라고 한다.
거킨빌딩은 친환경 건물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고층 건물에서 굴뚝 효과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지만 거킨빌딩은 이를 자연 환기의 방법으로 활용하고 있다. 외벽은 이중(二重) 유리로 되어 있는데 여름에는 이중 유리 속 공기가 외부 온도보다 높아 아래에서 위로 흐르고 더운 공기는 밖으로 나가게 된다. 겨울에는 공기의 흐름을 막아 이중 유리 외벽 속의 공기는 단열재로 작용하게 된다.
이렇게 작용하는 자연 환기는 창문과 블라인드를 통해 날씨에 따라 자동 조절된다. 유리 외벽과 광정으로 낮 동안 건물 내 조명은 자연광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렇게 자연 환기, 자연 채광을 이용하는 거킨빌딩의 에너지 사용량은 비슷한 규모 건물의 40%에 불과하다. 일반적인 오피스 건물은 쾌적한 사무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조명과 환기, 냉난방 등에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영화 ‘원초적 본능2’에 빌딩 등장
현재 지상층을 제외한 거킨빌딩 내부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영화를 통해 거킨빌딩 내부를 감상할 수 있다. 영화 ‘원초적본능2’에서는 주인공의 사무실로 거킨빌딩이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거킨빌딩을 찾아보는 것도 큰 재미가 될 수 있다. 거킨의 기획부터 완공까지 3년간 건설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거킨빌딩(The Gherkin Building)’도 있다. 이 영화는 건축가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건축주, 건물 사용자와 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 사이의 갈등을 조율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건물은 생김새만으로 그 가치가 매겨지는 것은 아니다. 거킨빌딩의 독특한 형태는 건물주에게는 마케팅 효과를, 런던에는 새로운 랜드마크를 제공하고 있지만, 그것보다 거킨을 더 가치 있게 하는 것은 친환경 건물이면서 사용자들이 바라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건축물에 대한 규제와 언론의 관심, 이해 관계자들 속에서 대립을 조율하고 제약된 조건들을 창조적으로 잘 극복해 나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