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부(患部)가 커졌는데 그냥 놔둬도 괜찮을지 아니면 더 부풀어서 문제가 생길지 판단이 어려운 상황이에요. 수술 여부를 결정하려면 당분간 더 면밀하게 상태를 관찰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정책 당국의 고위 관계자가 펄펄 끓어오르는 기미를 보이는 부동산 시장을 두고 “메스를 들지 말지 현재로선 판단 불가”라며 이렇게 말했다.
강남의 재건축 시장을 중심으로 부동산 경기가 급등세를 보이자 불을 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정부는 여전히 관망하고 있다.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지난주 국정감사에서 치솟는 집값을 잡으라는 지적을 받고도 “8·25 가계부채 대책의 효과를 보고 나서 결정하겠다”며 몸을 사렸다. 기획재정부와 국토교통부 관계자들은 “부동산 시장을 진정시킬 정책을 가동할지 여부는 전혀 결정된 것이 없다”며 손사래를 치고 있다.
◇햄릿이 된 정부
부동산 경기가 과열되자 정책 당국자들은 우려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부동산에 돈이 몰리면 소비 여력이 줄어 내수의 발목을 잡는 데다, 가계부채가 크게 늘고 있어 금융 시스템이 일시에 흔들릴 수 있는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주거비 마련에 허리가 휘는 서민층이 정부에 등을 돌리는 ‘정치적 부담’을 느낀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럼에도 정부가 액션을 취하지 않는 이유는 섣불리 손을 댔다가 전체 경기 흐름이 끊길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경제는 수출·생산·투자 지표가 바닥을 치고 있는 가운데, 그나마 건설·부동산 업종이 끌고나가는 형국이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경제 성장에서 건설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51.5%에 달해 1993년 4분기 이후 2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 비중이 2002~2014년 사이에는 평균 5.3%에 불과했다. 건설 투자라는 단발 엔진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치다.
한국은행도 같은 의견이다. 한은은 올해 1분기와 2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전년 동기 대비)이 각각 2.8%, 3.3%였는데, 건설 투자를 제외하면 모두 1.6%씩에 그쳤다고 분석했다. 땅 파고 건물 짓는 활동 없이는 2%대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집값을 규제하는 방안을 꺼냈다가 경기가 급랭하면 헤어나오기 어려운 늪에 빠질 수 있다는 게 당국자들의 고민이다. 정부 안팎에서는 “경제 성장률이 정부 성적표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인데 내년 대선을 앞두고 그걸 깎아내리는 정책을 쓰기는 쉽지 않다”는 이야기가 많다. 기재부의 한 관계자는 “문제점은 인식하고 있지만 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부가 ‘신중하고 우유부단한 햄릿’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지역별 편차 커 2006년과 상황 달라
정부를 더 고민스럽게 만드는 대목은 지역별로 온도 차가 커서 적절한 대응 방안을 만들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부동산 열기가 최고조에 올랐던 2006년에는 전국적으로 오름세를 보였지만 최근에는 활황을 보이는 수도권과 달리 지방에서는 내림세를 보이는 곳도 적지 않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올해 1~9월 주택 가격 상승률(전년 동기 대비)은 전국 평균치가 0.33%다. 서울은 1.26%, 수도권은 0.75% 올랐지만 지방(비수도권)은 반대로 0.06% 가격이 떨어졌다.
전국 11.6%, 서울 18.9% 오름세를 보여 정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던 2006년과는 상황이 다르다. 작년에 3.5%였던 전국 평균 상승률보다도 통계상으로는 한풀 꺾인 양상이다.
이찬우 기재부 차관보는 “강남 재건축 시장을 중심으로 일부만 상승 중일 뿐 전체를 보면 과열됐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물론 강남 재건축 시장 등 일부 과열 지역을 냉각시키는 규제를 서둘러야 한다는 이야기가 정부 안에서도 나온다. 하지만 그럴 경우 정부가 시장 전반을 위축시키려 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여 지방의 가격 하락세를 부채질할 수도 있다는 반론이 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강남 재건축 시장을 억누른다고 해서 그쪽으로 유입될 돈이 지방으로 흘러가지는 않기 때문에 정부가 가볍게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 “과감하게 가계부채 정리해야”
그래도 현재의 활황세가 계속되면 정부가 대책을 내놓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기재부 고위 관계자는 “부동산 시장을 진정시킬 수 있는 정책 수단은 많으며 성장률을 의식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지적은 오해”라며 “필요한 시점이 되면 꺼낼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좀 더 지켜본다는 게 정부 입장”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부동산 가격 억제책을 써서 가계부채 상승세를 막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부동산을 사서 빚을 떠안아줄 후손이 늘어난다면 가계부채가 늘어도 큰 무리는 아니겠지만 이미 생산가능인구 감소세가 시작됐기 때문에 빚을 내서 미래의 부를 가져다 쓰는 것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박창균 중앙대 교수는 “대출을 연료 삼아 불을 지펴 버블을 키우고 있기 때문에 임계점에 도달해서 충격이 오면 국가적 혼란이 불가피하다”며 “과감히 건설과 부동산 비중을 낮추고 수출과 내수를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